언제나 그렇듯 사무실은 이맘때 가장 바쁘다. 그런데  올해는 작년보다 더 강도가 높다보니 그 날 출근해 그 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나날의 연속은 당연한 수순이고 한 사람이 프로젝트 3개를 돌리는 팔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대금 결제는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경기가 회복된다는 망발을 입에 담던데...?)

오늘로써 일단 스트레스와 변비, 불면의 원인이었던 굵직한 프로젝트가 한 턴 쉬고 가는 지점에 이르러 이렇게 간만에 페이퍼도 남기고 알라딘도 둘러보는 여유를 부려보고 있다. (그래봤자 내일이면 또 정신없어지겠지만.)

그간 참 여러 일들이 발생했었다. 소장님의 깜짝 발언에 사무실 구성의 변화 신종플루에다 사무실 일로도 정신없는 지경에 그 외 일들로 머리가 복잡하게 꼬이고 꼬여 있다.

1.
소장님의 깜짝 발언은 사실 내 입장에선 그리 크게 놀랄 것도 아니지만 당사자들에겐 눈앞이 깜깜해지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사무실 인원을 정리하고 신규인원 뽑고 좀 더 효율적으로 사무실 운영을 돌리겠다는 말씀이셨다. 이런 전차로 정리단계에 들어가는 직원은 두 명.

한 명은 얼마 전 입사했지만 나이와 연차에 비해 일하는 것이 꽉 다물어져 열리지 않는 불량 압력밥솥마냥 답답 그 자체였단 직원과 간간히 내 페이퍼에 출연하여 그리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셨던 낙하산이 지목되게 되었다.

조용히 불러내 소장 실에서 나에게 이런 소리를 하시며 앞으로 좀 더 분발하자는 소장마마의 말씀에 단박에 질문을 던져 버렸다.

'소장님. 그 분 자를 수 있어요??"

'이미 말했다. 너 사정 봐주다 내 사정 엉망이 되었으니 이제 너 갈길 가라 했더니 사정사정하고 난리더라.'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이젠 나도 한계가 왔어. 봐줄 만큼 봐줬지. 내보내야지..'

소장마마와 대화 후 낙하산의 모습을 본의 아니게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나도 눈에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무실 규정 야근시간은 밤 10시인데 언제나 9시 30분에 홀연히 말도 없이 퇴근하는 모습이 사라졌다. 남들보다 늦은 11시쯤 퇴근한다. 어쩌다 바쁜 주말 언제나 토요일 오후 3시 칼 퇴근. 일요일 출근 절대 불가가 사라졌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고 피곤하다는 변명으로 주말에 쉬어야 한다는 자기만의 주장이 사라지고 일요일에도 늦게까지 일을 한다. 직원들과의 일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에 열중한다. 좀 지나치다 싶게 수다를 떤다. 사무실의 소소한 잡일거리를 솔선수범한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렸다. 그 원인을 알고 있기에 그 변화가 긍정적인 모습만으로 보이지는 않아 보이는 게 문제겠지만. 그래도 봉급날 코 앞에서 돈 떨어진 직원들 동전 털어 자장면 시켜먹을 때 호기롭게 삼선볶음밥을 주문하는 모습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 분 식대는 전액 사무실에서 지급된다.) 더불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식탐 역시..

변화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될지 아니면 정리가 될지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으나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라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불변의 진리를 바탕으로 따진다면 이 변화 역시 길어야 석 달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2.
위의 경우와는 반대로 스스로 사직을 하게 된 직원이 하나 있다. 일이 힘들어서, 보다 좋은 직장을 찾아, 공부를 더하기 위해, 시집을 갈려고 같은 일상다반사 같은 이유가 아닌 사귀고 있는 애인의 간병을 위해 그만 두게 되었다. (실리주의와 연애와 사랑도 자본과 직결되는 요즘시대, 순애보적인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사연이 깊다.)

대충적인 내용은 4년 넘게 사귀며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친이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다. 안암(암세포가 동공에 발생)확진을 받은 것. 결국 남친은 다니던 직장 휴직 계를 내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암세포 발생부위가 뇌와 너무 가깝기에 적출이 최선이란 선고를 받고 결국 한 쪽 눈을 적출하게 되었다.

문제는 다른 쪽 눈에도 전이의 가능성이 높아 3개월 정도 치료를 받으며 경과를 봐야 한다는 것. 집이 지방이기에 치료를 위해 서울에 기거를 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사회 생활하는 친 누나 집에 있었더니 누나와 어머니의 한숨과 통곡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인지라 자기의 여자 친구가 자취하는 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이상 직장생활을 계속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싹싹하고 그 나이에 다른 또래에 비해 책임감도 강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 사무실 노친내들이 대견하다며 예뻐했는데 어쩔 수 없이 사직을 하는 경우로 발전하였다. 사무실 사람들의 설왕설래는 이래저래 많이도 나왔었다.

내가 그 남친 이라면 차라리 이별을 택하겠다. 남자의 부모라면 죽고 못살겠다는 게 아닌 이상 남의 집 딸 인생을 위해 헤어질 것을 종용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인생이 먼저지 결혼도 안한 애인의 병수발을 해줘야 하는가? 그로 인해 받을 사무실의 타격도 결코 적지 않고  본인에게도 손해만이 있을 것이라는 등등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불어 이 모든 것을 결혼도 안한 자기 아들의 애인에게 떠넘기고 결혼까지 서두르는 남자 측 부모들의 모습에 대한 이해불가능의 발언들도 나왔다. (참고로 자세한 내용을 여자 측 집안에선 아직 모른다.)

하 지 만.

내가 많이 알진 못하지만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 녀석이 택한 최선의 방법이 그것이라는 생각하고 싶다.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도 열심히 살며 자기 동생 대학 학비까지 벌었던 녀석이었다. 요즘 또래의 아이들처럼 생각이 가볍거나 신중하지 못한 그런 아이는 아니니까.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퇴사하는 날 기운 내라는 말 한마디만 던져주고 말았다.

바라건대 암에 걸린 애인이 완치되어 둘이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현실은 다른 쪽 눈 전이율 80%가 넘고 당장이 아니라 10년을 봐야 하는 암이라는 문제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때쯤이면 알아서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라 믿고 싶다.


3.
사람마다 다 개인의 경우와 사정이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이런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을 바쁜 와중에 관찰하고 생각하다 보니 가뜩이나 나이 먹고 기억력이 반 토막이 된 머릿속은 복잡해졌지만 득도까진 아니더라도 꽤 덩어리가 커다란 무언가를 깨달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사람의 깊이는 얼마나 오래살고 적게 살고로 정해지는 건 결코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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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1-0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장님의 결심이 안 바뀌길 바라고, 퇴사하신 그 분의 소중한 사람이 건강히 완치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엔, 정말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ㅜ.ㅜ
그나저나 메피님, 반가워요!

Mephistopheles 2009-11-05 12:24   좋아요 0 | URL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듣기로는 자신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남겨줄 것을 간곡히 요구를 하는 모양입니다. 조만간 결판이 나겠죠..^^

카스피 2009-11-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아직까지도 경기가 어려운가 봅니다.메피님 기운내세요^^

Mephistopheles 2009-11-05 12:25   좋아요 0 | URL
서부전선 이상없다. 라는 소설마냥 최전선에 위치한 군인들은 피와뼈가 발리며 전쟁에 내놓아져있고 저 윗분들은 그냥 평화 그 자체...이것과 똑같은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인 2009-11-02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이 답답해지네요..

Mephistopheles 2009-11-05 12:26   좋아요 0 | URL
어쩌겠습니까. 본인의 행동으로 인해 야기되어진 일과 본인의 선택으로 진행되어지는 일..모두 자기책임이겠죠.^^

비연 2009-11-0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드문 분이네요. 다 잘 되길.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Mephistopheles 2009-11-05 12:26   좋아요 0 | URL
요즘 세상엔 참 드문 일이죠. 같은 예로 이번에 퇴직한 직원보다 나이 좀 더 어린 20대 중반 여직원은 공공연히 결혼은 무조건 돈 많은 남자를 잡아야 한다라고 공언하던 것과 사뭇 비교되죠..^^

순오기 2009-11-0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바쁘시군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에 공감하고~ 애인 간병을 선택한 그녀가 내딸이라면 결코 칭찬하지 못하겠지만...그래도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랑도 있다는 게 위안은 되네요.

Mephistopheles 2009-11-05 12:27   좋아요 0 | URL
다만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유형이며, 고생길이 뻔하다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현실이라는게 답답할 뿐이죠..^^

BRINY 2009-11-0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장님 결심이 안바뀌길 바랍니다.
그 여직원분이 제 후배나 동생이라면 죽어라 말릴 겁니다. 남자가 병자건 말건 싫은 소리 수십바가지 던져줄 거 같구요. 그 여자분이 나중에 후회안하기만을...

Mephistopheles 2009-11-05 12:28   좋아요 0 | URL
분위기 상으로 거의 바지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만...뭐 알아서들 하겠죠. 그리고 아마 결과가 어찌 되었던 후회는 안할 꺼에요. 본인도 할만큼 해보는데 까진 해보이겠다고 했었으니까요..^^

토토랑 2009-11-0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피님은 참 반가운데
그 후배분의 이야기는 먹먹하네요.. 속 깊은 분이겠지만.. 에휴..

Mephistopheles 2009-11-05 12:29   좋아요 0 | URL
자신의 삶을 저당잡히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정작 본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알아서 잘 해쳐나갈 꺼라 보고 싶을 뿐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1-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피님 반갑습니다만..
참 소식이..
건강조심하세요.

Mephistopheles 2009-11-05 12:29   좋아요 0 | URL
건강이야 뭐....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주 죽겠습니다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