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 태어나서 30여년 넘게 살아오며 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선택을 강요받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를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아리까리한 4가지문항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객관식 시험문제에 선택을 강요당해왔다, 이 선택의 순간은 전개되어지는 교육정책과정에서 충실하게 지속되었다. 그나마 군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풀었던 예/아니오는 확률 50%로 정상, 미친놈을 판가름하는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선택의 순간과 마주쳤던 기억도 난다.
그 후 대학이라는 곳에서 객관식은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가뭄에 콩나듯 객관식이라는 선택의 순간이 왔었지만 웬걸 머리 크고 사회에 나오는 더더욱 골 때리는 선택의 순간에 봉착하게 되버린다.
저거저거 나이, 계급 띠고 한 번 받아버릴까.
절대로 그 날짜에는 못 맞춘다고 직언을 던져버릴까.
나 이 여자와 결혼해도 될까..
나 지금 형편에 아이를 낳아야 하나..
사무실 때려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날까...
자식의 교육을 위해 조금은 무리수를 둬볼까...
확 뒤집어버리고 잠수타버릴까...
저 인간..죄다 까발려서 처참하게 묵사발로 만들어버릴까...
등등 수도 없이 학생때 만났던 정형화된 선택이 아닌 추상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많이도 우왕좌왕하곤 했었다. 그 중 몇 가지는 결과치의 환산으로 완벽한 선택을 했던 반면 때를 놓쳐 최선의 결과치를 내지 못했던 경우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
위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에 대한 선택의 경우의 연장선상으로 난 오늘 대부분의 이 나라 국민이면 강요당했을 혹은 갈등했었을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원래의 나라면 분명 12지선다형 문제지에 다다다 12개의 붓뚜껑을 찍었어야 가장 나답다라는 선택을 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번 선택이 다른 때의 선택과는 다른 이유는 역사상 최악의 후보 등장이라고 주관적인 판단을 앞섰기에 그 반대급부에 단 한 개의 붓뚜껑 자국을 남기는 선택을 취했다.
결과는 어쩌면 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치에 따른 나의 투쟁은 지금부터다.
뱀꼬리 : 투표를 마치고 사무실에 출근하는데 오늘따라 사무실 “문”이 뻑뻑한게 잘 열리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