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의 정규교육과정 중에 나의 멘토라고 불릴 수 있는 선생님의 존재는 아쉽게도 두 분정도밖에 없었나 보다. 짧지 않은 12년 동안 나에게 가르침을 선사하신 선생님들은 담임선생님 12분을 제외하더라도 꽤 많은 분이 존재하겠지만, 유독 내 기억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선생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 두 분이셨다.

초등학교 5학년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지금처럼 엄청난 사교육의 열기가 존재하진 않았었다. 아이들이 미리 중등과정을 배우거나 아니면 갖가지 수학과 영어학원에 방과 후 시간이 헌납되는 경우 또한 없었다. 기껏해야 피아노 학원이나 주산학원, 좀 더 나아가면 태권도 도장이 그때 당시 누릴 수 있었던 사교육의 종류였었다.

 

 그러나 난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 밤늦도록 담임선생님께 붙잡혔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글씨" 때문이었다. 기억에 그 때 담임선생님은 글씨를 참 기가 막히게 쓰셨던 분이셨다. 우연히 먹물로 붓을 찍어 글씨를 쓰는 서예글씨체를 보고 그 어린 나이에 이야~ 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의 명필을 뽐내시던 분이셨다.

 검은 뿔테 안경에 길쭉한 키에 마른 체형의 담임선생님은 당신의 글씨가 명필이셔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글씨의 중요성을 언제나 강조하셨다. ㄱ부터 ㅎ까지 획 순서대로 쓰지 않는 모습이 지나치다가도 발각되면 언제나 지적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2학가 가을 때쯤 정규교과과정이 끝난 시간 후 학생들을 붙잡아 놓고 교과서의 어느 단락을 습자해보라는 선생님의 요구사항에 나를 비롯한 반학우들은 궁시렁거리며 그 분의 요구를 수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 긴 단락이 아니었기에 금방 베껴 쓸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꼼꼼히 글씨체를 살펴보시던 선생님들은 몇 명의 학생들을 호명하고 그들에게 하교명령을 내리셨다. 기억엔 1/3정도의 학생이 빠져나간 듯싶었다. 그 후 또 다시 똑같은 단락의 습자를 반복했고, 몇 명의 학생이 빠져나가고 그렇게 몇 차례의 반복되는 습자로 학생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남은 학생은 나를 포함 5명 정도였었다. 똑같은 내용의 단락을 벌써 몇 차례나 쓰고 있으니 그 어린나이에 성질도 나고 분하기도 했었나 보다. 반항한다는 의미로 난 글씨를 또박또박 90도 혹은 180도가 되도록 직각으로만 습자를 시작했고 ㄱ부터 ㅎ까지 정확히 교과서대로의 획수에 맞춰 쓰기 시작했다. 전혀 예쁘지 않은 글씨, 각이 서고 날이 선 글씨를 제출하고 나서야 선생님의 하교명령이 떨어졌다. 해는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졌고 분한 마음에 집까지 찔찔 짜며 갔었다.

 다음날 조용히 나를 부르신 담임선생님은 왜 그리 오랫동안 나를 붙잡았는지 그 나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조근조근 설명을 해주셨다. 어렸을 때 글씨는 평생 간다며 지금 잡아두지 않으면 너의 글씨체는 아마 평생 그렇게 갈 것이다. 그리고 글씨는 곧 사람의 마음이다.  전날과는 상반되는 다정한 설명에 순진한 초등학생은 고개를 끄떡거리며 선생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나이 먹고 업종의 특성상 망측하게 변해버린 글씨체를 가지게 되었지만 -우리쪽업계에선 글씨도 하나의 도면요소로 보기에 최대한 도면과 어울리게 작성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도 손으로 그릴 때나 이야기지. 이젠 모든 글씨는 어느 서체, 어느 폰트를 쓰느냐로 결정되어질 뿐이다.- 어쩌다 종이에 글씨를 끄적거리게 되더라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의 가르침을 적용시키는 곤 한다. 그 분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휘갈겨 쓴 글씨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반듯한 글씨가 종이에 또박또박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그때 내 담임선생님은 여자선생님이셨다. 거기다가 교과과목은 가정. 조회시간과 종례시간 때말곤 수업시간에 마주칠 일이 없는 분이셨다. 대신 방과 후 붙잡혀 질리도록 얼굴을 마주하곤 했었다. 그 당시 중학생들에겐 존재하지 않았던 야자를 미리 경험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언제나 반강제적으로 붙잡혀 밤 7시 8시까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공부를 하고 쪽지시험을 보고 하교를 하곤 했었다. 이때도 역시 한 시간동안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풀고 쪽지시험을 보고 몇 점 밑으로 다시 암기..또 시험..이런 반복과정이 계속되었다.

 수학은 문제가 없었지만 영어만큼은 잼뱅이였기에 난 하루걸러 한번씩 꼭 저녁 6시까지 붙잡히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그런 내 모습을 어머니는 매우 흡족하고 만족스럽게 지켜보곤 하셨다. 항간에 소문으론 어머니는 내 중학교 첫 담임이 그 분이 임명되셨다는 말에 아주아주 기뻐하셨다고 한다. 학생들 공부를 얼마나 시키는지 학군 내에서 소문이 난 선생님이셨던 것.

 지옥 같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마주쳤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언제나 나에게 너 이번에 영어 몇 점 나왔냐가 내 인사에 대한 답변으로 날아오곤 했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언제나 내 성적에 관심을 보여주시던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역시나 그 학교에서도 똑같은 이유로 명성을 유지하셨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은 아직도 기억난다.
"늬들은 내가 끔찍이 밉고 지겨울 진 모르겠지만, 난 너희들 엄청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난 늬들에게 이렇게 공부를 시키는 거야. 무슨 말을 해도 지금은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딱 10년 후 너희들은 아마도 그때까지 날 기억할 거야. 좋게든 나쁘게든.."

 그 말씀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난 아직도 그 분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면 분명 열혈에 극성이 첨부된 내 선생님들이겠으나, 이 나이 먹고 생각해보니 그분들만 한 선생님도 없었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 지금처럼 교권이 땅에 처박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발생하며 서로의 믿음이 금이 가버린 요즘의 교육현실과 비교해보면 볼수록 더더욱 빛이 나는 나만의 멘토셨던 분들.

 포기를 모르고 끝까지 어쩌면 열등생일지도 모르는 단 한명의 학생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기억하면 현재의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다잡아본다.

감사합니다. 송강규선생님
감사합니다. 권순명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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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7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면서 생각나는 선생님은 3명.
주니어 시절 - 마귀같은 선생과 천사같은 선생. 그리고 그 후 10년이 지난 시절에
만난 '어머니'같이 다정한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 받았던 기억.
그러고보니 모두 여선생들이었군요. 마지막 선생님은, 제가 마음만 열었다면 정말
대단한, 진정한 '멘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죠. (긁적)
나에게 있어 '나를 키운 것'은 만화책들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순오기 2007-12-17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셨네요~~ 부러워라!

야클 2007-12-1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접하는 '안 웃긴' 메피님의 페이퍼네요. 언제한번 필체를 한번 올려주시죠.^^

뽀송이 2007-12-17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글을 읽는 동안...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제가 그 즈음에 아주 슬픈일을 겪었는데... 정말 진심으로 저에게 힘이 되어 주셨거든요.
절대 잊혀지지 않을줄 알았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니까... 차츰 기억에서 사라지려는 것이 저를 더 슬프게 하네요.^^;;

마늘빵 2007-12-17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딱 한 분 생각나는군요. 중학교 2학년 담임샘인데, 계속 만나뵙고 싶었지만 참았답니다. 실망스러운 모습 보이기 싫어서. 이제 됐다, 싶으면 그때 찾아뵈려고요. :)

클리오 2007-12-17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럴 때마다 가끔은 고민입니다.. 메피 님의 중학교 담임샘은 물론 사랑으로 가르치셨기에 기억에 남으셨겠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 지옥같이 맞고 공부만 했지만 결국은 그 덕분에 좋은 대학가서 성공했기에 그 시절이 미화되고 때로는 교사같지 않다고 비난되는 사람들이 '열의있는'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기에 말입니다.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일까요. 싫다는 애들을 억지로 붙잡아 결국은 공부하게 하는 선생님? 아니면 이것이 교육적이지 못하다고 자율에 맡기는 선생님? 애 엄마를 잠시 잊고 오랜만에 교사로서 한번 고민해봅니다. 메피님 글에 대해 뭐라하는건 아니니 오해마시라요~

깐따삐야 2007-12-17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은 날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단어 외우라고 시켰던 선생님이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더라구요. 비 오는 날 클래식 틀어놓고 남편이랑 아기 자랑 하시다가, 한번 삘만 받으면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두르시곤 했는데.-_- 좀 독특한 분이시긴 했지만 덕분에 단어 만큼은 원없이 외웠던 것 같아요. 저는 그만한 열정이 있는가, 돌아보게 되기도 하구요.

Mephistopheles 2007-12-17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 결국은 엘신님은 유년시절때엔 "시니컬 보이" 였단 말이시군요...흐흐흐
순오기님 // 그 반면..어쩌면 가장 중요하다는 고3 담임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돈을 너무 좋아하는 분이셨죠. 졸업 후 학교 갔더니....차를 바꾸셨더군요..허허헛
야클님 // 안 웃긴 페이퍼 종종 올렸는데 야클님의 관심이 식으신걸지도 모릅니다..^^ 필체는 개판입니다. 손으로 도면그린 마지막 세대이다 보니..^^
뽀송이님 // 그래도 제가 어릴땐 선생님 하면 다정하고 따뜻하고 인자한 느낌이 대부분이였는데 요즘은 그때보다는 덜 한가봐요. 선생님에 대한 가지가지 비속어가 남발하고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좀 거시기해요..^^
아프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스승님은 제자의 못난 모습까지 감싸주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그런데 꽃미남 아프님이 어디가 못났다구??
클리오님 // 아하..^^ 사실 페이퍼에 싣지 못한 다른 사연도 있어서 더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세요. 그 선생님이 나이가 지긋하신데도 자식이 없으셨거든요. 정확하진 않지만 불임이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냥 가끔 선생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끈적한 모정같은 것이 조금씩 느껴졌었어요..^^
깐따삐야님 // 무서운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라고 하잖아요. 제가 페이퍼에 모신 선생님들은 무섭거나 폭력을 동반하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모든 걸 말로 조분조분 이해시키셨던 분들이셨죠..^^


비로그인 2007-12-18 01:21   좋아요 1 | URL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도 충분히 시니컬하답니다. ( -_-) 긁적..

춤추는인생. 2007-12-18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삐뚤삐뚤 글씨는 제가 완전 사랑하는 남자들의 글씨체인데. ㅎㅎ 못쓰는데 왜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글씨체가 저는 참 좋더라구요. 오늘의 메피님이 탄생하시기까지. 스승님들의 눈물겨운 페이퍼 잘 읽었답니다.. 실은 저도 중학교 가면 좀 삐뚤어질지 알았는데.1학년 담임이 저를 잘못보신관계로 1년동안 잡혀살면서 공부를 하곤했죠. 시험때마다 집에 걸려오던 담임의 전화. 참 지겨웠는데. 오늘따라 무척이나 그립네요

보석 2007-12-18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째서 전 싫은 기억만 잔뜩 가지고 있을까요;

Mephistopheles 2007-12-18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 음...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글씨를 일부러라도 삐뚤어지게 쓰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왜냐고는 묻지마세요..ㅋㅋ 돌이켜보면 그렇죠. 어렵고 힘든 선생님이 기억에 많이 남는 건 그 옛날 고전에 나오는 선생님의 존재감때문일지도 몰라요.^^
보석님 // 틀이라는 걸 싫어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쩌면 선생님들과 궁합이 안맞을지도 몰라요.

webols 2008-01-25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반가운 마음에 글을 씁니다. 권순명 선생님, 가정선생님.. 저 중학교 2학년때 담임이셨거든요. 저 그분을 찾고 있는데 혹시 현재 어디계신지 알고 계신가요? 아니면 어느학교를 언제 졸업하셨는지 알고 싶네요.

Mephistopheles 2008-01-26 00:04   좋아요 1 | URL
저는 중학교 1학년때였습니다. 관X중학교였고요..^^ 제가 졸업하고 2년 정도 더 계셨었는데 그 다음엔 다른 학교로 옮기셨지요.^^ 언제였더라..그러니까...1980년대였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