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70609
≪시적 정의≫ 서평 별점 ; ★★★ 구매
한 달도 더된 어느 날 (4월 중순, 4월 말?)에 어떤 신체 활동을 하다가 꼬꾸라졌다. 나는 양쪽 다리에 꽤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내가 나의 신체 능력을 (나이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가?) 과대평가한 것이다. 이때 내 곁에 안해와 아이가 함께 있어 그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야단을 맞았다. 안해는 나이를 고려했을 때, 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고 했다.
딸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나와 안해는 아이의 울음을 달랬고, 안해는 내게 ‘딸 키운 보람’이라고 했다.
우선, 이때의 나의 감정은 ‘어이없음’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그 동안 아이를 달랬고, 집에 돌아와 침착하게 아이가 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아이가 왜 울었을까? ; 아이는 자신과 친밀관계에 있는 아빠가 다친 것을 자신이 다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만약 아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어도 그리 울었을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안해는 내게 ‘아이 키운 보람’이라고 하지 않고 ‘딸 키운 보람’이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여성의 공감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니.
그러나 내 판단에는 ‘아이가 운 상황’에 ‘공감’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감정은 ‘어이없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내 생각-감정 공감했다면 ‘어이없음’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아이가 느낀 것은 고통-슬픔이었다. 아이의 행동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이입’이다.
p33 문학 작품은 일반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또 그들의 경험과 마주하게 한다.
p88 우리 스스로를 친구로서의 공감과 감정을 이입하는 동일시를 통해 등장인물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나의 운명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독서라 함은 동화책 또는 위인전을 읽는 것이었고, 중학교 시절 이후는 소설을 읽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내게 ‘시’가 좋으냐, ‘소설’이 좋으냐고 물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내가 한참 동안 주저주저했기 때문이다. (결국 답은 시로 했다.)
내가 소설을 읽고 어떤 감상과 판단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참 독특하네요’, ‘참 특이하네요’라는 평가를 들은 적이 많다. 즉 소설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또 그들의 경험과 마주하게 하고 공감과 감정을 이입하는 동일시를 통해 등장인물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사고 체계를 바꿔주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 결과는 동일하지 않다. 소설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소설의 의미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보다 잘 설명되어 있다.
내가 회의하는 것은 ‘오직 소설만이’, ‘오직 문학만이’라고 표현할 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산의 정상(道)에 오르려 할 때, ‘시 詩’라는 등산로, ‘소설’이라는 등산로, ‘물리학’이라는 ‘수학’이라는 등산로가 존재하는데, 산의 구조상 ‘소설’이라는 등산로를 경유하지 않고는 정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진실이냐 하는 것이다.
p247 휘트먼과 같이 나는 시민들이 갖는 다양한 자유권과 평등권의 중요성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은 이러한 권리들을 다루는 데 소중한 길잡이를 제공한다./p248 그는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서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그들의 감정은 인정받는다고 단언한다.
심지어 지혜롭고 경륜이 높은 어느 할머니는 (소설은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고 그 경지에 있다. 내가 착각한 것일까?
뱀발] 1) 내가 독서에서 얻은 것이 많을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권 强勸할 정도로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기야 내가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이 있기나 했냐마는.)
2) 존중받아야 될 문학, 소설이라는 주제가 전부라면 ; 차라리 소설 한 권을 더 읽을 것 그랬다. 내가 문학이나 소설을 얕잡아 본 적은 없다.
3) 시적 정의, 문학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주제라면 ; 단편적으로 친일 문학이 존재한 것이 반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