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身邊雜記 170112
- 통행금지
지난 해 연말에 직장 회식이 있었다. 한 여직원A이 9시가 되니, 집으로 가려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잘 들어가라고 인사를 나눴는데, 옆에 있던 직원B이 A씨는 통행금지 시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풋.’ 다 큰 어른에게 무슨 통행금지 시간.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 것처럼, 가정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그러려니 했다.
엊그제 안해 직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가족은 대학생인 된 딸의 통행금지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시. 이번에는 ‘헉’ 8시나 9시도 아니고.
이때 어느 알라디너B 독후감에서 본 문장, ‘의심해서 미안한 것보다 의심해서 안전한 것이 낫습니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문장은 성폭력에 대한 감상이지만, 국가 안보, 질병에 대한 진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리다. 세 가지 모두 치명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위 독후감 문장의 도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악어 프로젝트≫와 비슷한 내용의 책일 것이다.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여기면서 미안한 감정보다 성폭력에 대한 여성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이 논리는 페미니즘의 사고에서 출발한 논리다.
그러나 ‘통행금지’를 페미니즘에 기초한 동일한 논리에 찬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대학 캠퍼스 내의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통행금지는 남성주의, 가부장적 사회의 결정이다.
내가 보기에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력에 관해 ‘의심해서 미안한 것보다 의심해서 안전한 것이 낫습니다.’를 긍정하고 반면 성폭력에 대비로서의 통행금지의 ‘의심해서 미안한 것보다 의심해서 안전한 것이 낫습니다.’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궁금증] 그렇다면 스스로 페미니스트를 주장하는 여성이 딸의 어머니로서 딸의 통행금지를 긍정할까, 부정할까?
뱀발 ; 두 가족의 사는 지역을 문제 삼을 수도 있으나 ‘지역’에 대한 편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