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십보백보


 청우제 주인장이 무인도 이야기에 관한 의견을 제시해 왔습니다.


 내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대부분의 사람은 작은 상황에서는 양심을 지키지만 정말 힘든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을 말한거고... 내 생각은 모두 샘물을 먹게 되리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거지... 말로 양심을 지킬거라고 숱하게 말해왔던 사람들이 변심을 하는 것을 나는 정말 많이 보아왔다. 그럴 경우 무조건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겠니? 그건 아니라고 본다.

 맹자를 보면 오십보백보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두가 알듯이 전쟁터에서 오십 보를 도망한 사람이 백보 도망한 사람을 비난했는데 맹자는 도망했다는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를 백보와 이백 보에 적용해도 동일하고 오백 보, 천보에 적용해도 동일합니다. 또한 오십 보와 십 보에 적용해도 동일하고 다섯 보나 한 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보와 천보가 같은 것입니다.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데, 적군과 싸우고 있는 우군 병사가 적군이 휘두른 칼을 피해 뒤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후 적군을 물리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날 전투가 끝난 후 한발 짝 물러난 병사에게 너는 왜 한 발짝(일보) 후퇴했느냐고 야단을 치면 더욱이 천보 도망친 병사와 똑같은 처벌을 내린다면 합리적일까요. 그렇지 않죠. 사회과학의 한 이론 중에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를 가져온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위와 같은 논리는 낙태에서의 생명의 정의에서도 적용됩니다. 막 태어난 신생아와 태어나기 하루 전 태아와 생명의 정의 기준이 될 만큼 차이가 있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주까지 조산으로 정의하지 않고 정상 분만을 규정합니다. 그럼 임신 9개월과 6개월은 차이가 있을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4개월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따지다 보면 신생아와 수정란과 같게 됩니다. 이 둘을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요. 수정란에서 신생아까지 (심지어 수정 자체도) 연속spectrum을 갖습니다.

 제가 2004년 9월 1일 페이퍼 <마차>는 정체성에 관해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무인도에서 샘물을 먹을 것이냐가 본질적 문제라면 언제 물을 마실 것이냐가 또한 실질적 적용에서의 새로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을산님의 댓글을 보면 ‘마립간님께서 제시하신 문제들 중 '선한 전쟁' 혹은 '악법도 법이다' 혹은, '신앙의 권유' 같은 부문은 저는 '하나의 답은 없다' 라는 생각인데 (중략) 저는 이런 주제를 생각하면 무수한 상황과 개개인의 가치판단에 일관되게 적용될 원칙이 과연 있는지부터 고민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답을 계속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라고 쓰셨습니다.

 악법의 예가 횡단보도에 건너는 사람이 없는데 신호대기가 너무 길어 교통 혼잡을 일으키면 그 법은 악법이겠지만 저는 가능한 지키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법이 아침에 일어나서 북극성을 한번 처다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사형을 시키겠다고 하면 저는 그 악법 폐지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악법의 악법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킬 수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개의 정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조건 없이 단 하나의 문장 ‘악법도 법이다.’라고 제시한 것은 가을산님이 지적한 무수한 상황과 개개인의 가치판단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에 대한 물음 즉 가치관에 대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합니다.

 사람의 중요한 질병 암에 대한 비유를 하자면 무수한 상황 즉 개인의 암질환, 나이, 전신 상태를 종합한 암 치료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술 또는 약물로 암세포를 제거하고 정상세포는 보존한다.’ 그러나 일반이 이 원칙만 안다고 해서 치료할 수 있은 암은 없습니다. 위암이냐, 간암이냐, 대장암이냐에 따라, 환자의 병기에 따라, 나이 또는 전신 상태에 따라 무수한 조합이 나오기 때문에 지식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치료법이 개발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총괄한 원칙, 가치관, 철학을 추구하게 된 이유는 게으름입니다. 제가 인문학보다 자연과학, 특히 물리, 수학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개인적 흥미이죠.) 그 이유는 인문과목에 대한 시험은 각 항목을 암기해야 하는 반면, 물리나 수학은 그 내용을 이해하고 공식만 외운다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학공식조차 암기하지 않아 수학시험 도중 공식을 유도하여 푼 적도 있습니다.

 대학 교양 과목 물리 수업 중 조교 선생님이 (농담삼아) "우리 집에서는 머리가 좋으면 물리학과, 수학과에 지원하고 머리가 나쁘면 의대에 지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저는 물리 수학을 좋아하던 시절이라 당연히 동감하였습니다. 학년이 올라 미생물학 수업시간이었는데, 교수님이 ‘물리, 기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1 더하기 1은 2이다 외에는 생각하는 바가 없다. 1.5또는 3 등과 같은 유통성이나 창의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Y 교수님이 이 말씀을 하기 전 까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기자가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놀라운 과학적 발전이 있는데, 왜 정치적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없죠?’라고 질문했을 때, ‘물리학이 정치보다 쉬워요.’라고 대답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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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12-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는 대학 교양과목으로 아인슈타인과 우주라는 물리학 과목을 들었거든요. 그 교양과목은 정외과, 법학과 뭐 이런 인문과만 듣는 거였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였어요. 정외과 학생은 교수님 말의 논리모순을 나와서 칠판에 써가며 지적하질 않나, 물리학과는 상관없는 소리들을 마구 해댔죠.
그리고 드디어 시험날...상대성이론이 뭔지 말해보라는 문제였는데, 당근 모르죠.
그래서 사회현상의 고찰에 대한 상대적 시선 어쩌구 그럼서 정말 인문학적인 소리만 하고 나왔는데~~~에이뿔따구 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