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710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 레비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유명하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엔 인간은 역사의 의해 진보한다는 사르트로의 논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곰곰생각하는발 님의 글 ‘올드보이’에서 발췌)

 

* 올드보이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45646

 

질문 1 ; ‘인간 사회는 (역사를 통해) 발전해 왔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를 주저한다. 어찌 보면 발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걸어 다니기만 했던 사람이 자동차를 발명하여 먼 거리를 이동하고, 비행기와 우주선을 타게 된 것을 생각하면 발전한 것 같다. 과학기술만 발전했다고? 사회 문화를 보자.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렸고 그것을 타당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공식적인 노예 제도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는 아테네의 귀족만 존중받을 수 있었다. 다른 폴리스의 귀족의 존중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인간 누군가에 대해 가금 공감과 연민을 느낀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는 인간 사회가 발전한 것 같지만, 인간의 전쟁의 빈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계급은 사라졌으나 계급과 같은 계층이 존재한다. 외적 사회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나아졌지만, 내적 공감과 이해는 약화되었다. 무엇이 발전했다는 말인가? 또한 역사에 의한 발전은 과거의 사회가 미개했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인간 사회의 어떤 점이 미개했다는 말인가?

 

질문 2 ; ‘생명은 (진화를 통해) 발전해 왔는가?’

 

인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생명은 발전해 왔다는 인상을 준다. 단세포보다는 다세포 생물이, 절지동물, 어류보다는 포유류가, 포유류 중에서도 영장류가, 영장류 중에서도 메타 인식을 하는 인간이 발전된 것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발전의 방향, 인식이 자체가 임의적이다. 왜냐하면 삶을, 생명을 긍정하는 시각을 부정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매미라는 며칠 동안의 성충의 삶보다 몇 년간의 굼벵이로 삶을 긍정하고 성충은 단지 번식을 위한 장치로 생각한다면 어떤 모순이 생기는가? (아무런 모순이 없어 보인다.) 만약 애벌레의 삶까지 긍정한 디오게네스-양주주의적인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 매미의 생활사를 통해 매미라는 성충으로 목표로 애벌레를 과정을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적인 생각에는 어떤 오류가 있는가?

 

이 책에 ‘문화적 편향’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화’라는 수평적 가치관이고 ‘편향’ 수직적 가치관을 갖는다. 마치 형용 모순과 같은 이 같은 문구가 가능한 것은 맥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화론 역시 임의적이나 맥락을 고려하면 목적론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매미라는 곤충의 구체적 실체와 삶의 실체를 벗어난 목적을 구하는 플라톤-노자주의적 견해가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든 견해가 맞는다면, 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도덕적 다원주의처럼 선택 사항인가? (선택 사항이라면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진화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굴드적인가? (굴드적이라고 함은 원인은 비선형적 순서이나 이유/결과는 선형적인 것을 말한다.)

* 임의적 분포가 카오스 규칙을 따른다면 또는 임의적 상황이 통계 분포를 따른다면 ; 정녕 임의적인가? (예를 들어 비행하는 생물은 비행에 관한 물리학의 제한을 받을 것이다. 완전 임의적일 수 없다.)

* 진화가 임의적이라면, 눈eye이 발생했다가 퇴화했다가 다시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눈을 창발할 수 있는가? (그런 예가 발견된 적이 없다.)

* 진화가 임의적이라서 이 우주에서 생명 창발의 발생률이 극히 낮다면, 특히 인지認知를 가진 생명체의 발생 가능성이 극히 낮다면 (즉 우리 우주에 생명체를 가진 행성이 유일하게 지구이며 인간이 유일하게 인지를 가진 생명체라면) 창조론의 반증을 구할 수 있을까.

 

* 굴드와 레비트로스에 반한 도킨스와 사르트르의 목적적 상위 개념은 무엇이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7-11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인이 적극 개입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는데 레비옹이 보기엔 이미 원시 사회는 현대 사회만큼 정교한 구조적 틀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죠. 과거는 야만이고 미래는 진보'다, 라는 것을 레비옹은 믿지 않았습니다. 굴드 에세이가 뛰어난 점은 과학서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서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애벌레 매미 비유만 해도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마립간 2014-07-11 07:44   좋아요 0 | URL
저도 굴드의 사상은 진화론에 바탕을 둔 과학이면서도 인문-사회를 포함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읽은 많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에서 굴드를 언급하니까요. 처음 굴드의 사상을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저와 같이 플라톤-노자주의자에게는 말이죠.

샤르트르와 레비트로스의 입장은 위 글에서 언급했지만 어느 쪽을 지지하기가 힘듭니다. 샤르트르의 입장을 지지하려니, 과거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면서 명확한 미래의 목적이 보이지 않고, 레비트로스의 입장을 지지하려니, 무기력을 느끼게 합니다. 어짜피 변할 것도 없는데, 뭐하라 애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