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기침 님께서 주신 의견에 대한 저의 견해

 

* 독서일기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52817

 

1-1) 님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플라톤이 본질주의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본질주의자입니다. 둘의 차이는 단지(단지라고 하기에는 틈이 많지만요)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 내에 존재하는 지입니다.

 

저도 일정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플라톤-노자주의는 원리(이데아 idea)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세상을 통해 원리가 보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플라톤-노자는 주리론主理論이고,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주기론主氣論에 해당합니다. 저의 이런 설명이 푸른기침 님께서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 내에 존재하는 지와 같은 의미입니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왜 아리스토텔레스를 나는 본질주의자라고 하지 않는가?

제가 아리스토텔레스-장자를 본질주의자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의 진화론 때문입니다. 플라톤-노자주의자에게 토끼rabbit가 존재하는 것은 토끼 이데아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자에게 토끼가 생긴 이후 토끼의 개념 즉 본질을 부여했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본질주의자이지만,) 저는 본질의 개념, 정의는 무엇인가를 되묻습니다. 본질은 변화할 수 있는가? 본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시겠지만 재귀적 질문을 선택이 곧 답입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것(최소한 우리 우주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는 변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선택했습니다. 토끼에 관해 플라톤-노자주의 개념 적용은 틀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개념 적용은 맞지만, 저의 본질의 정의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푸른기침 님이 사용하신 ‘본질주의’ 개념에 이성주의/합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1-2) 어찌보면 서양 철학은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몇 개의 사조나 철학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질주의입니다.

 

어느 과학철학자가 플라톤 이후 근세까지 서양 학문이란 플라톤이 벌려 놓은 일을 뒤처리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1-3) 물론, 님께서 플라톤을 본질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단기적 맥락으로 대응시킨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대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동치同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제 정형의 1) 플라톤-노자, 아리스토텔레스-장자, 디오게네스-양주2) 본질주의, 단기적 맥락, 장기적 맥락이 동치라면 한 개의 정형이 다른 정형의 틀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따로 쓰고 있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동치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일맥상통하는 면을 대응이라고 하였는데, 더 적절한 용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두 정형의 연결에 관해 불확실한 면 때문에 어색함을 느낍니다.

 

2-1) 노자의 '도'를 플라톤의 이데아에 억지로 쑤셔 넣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은데, 이는 노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道라는 어감 때문에, 도덕경의 첫 구절 때문에 오해하기 쉬우나 道는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도道

저는 도가 이데아를 초월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기理氣론에서 주희는 주리론을 주장하면서 리理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황은 주리론을 주장하면서 리는 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리는 변하는 것일까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현재로서는 과학의 영역( 즉 반론이나 검증이 이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선택이 존재하는 철학의 분야입니다. 주희가 주리론의 리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했다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순환논리의 모순이죠.

 

도가 변하는 것인가 아닌가? 저는 여기도 (과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도를 뭐라고 했건 간에 저는 도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그와 같은 선택을 한 배경에는 도와 악덕惡德의 관계 때문입니다. 주리론이든 주기론이든 세상을 총괄하는 것이 도인데, 도에서 악덕이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도가 변하여 악덕이 발생한다면, 악덕, 악인을 포용해야하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는 도는 더 포괄적으로 multiverse와 metaverse를 관통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지칭합니다. 제가 이렇게 임의적인 정의 하에 사용하여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를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것으로 정의했습니다만, 도가 항구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악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여기에 도의 운행, 변화로 설명하고, 변화하는 도를 포함하면 도는 변화하는 것이죠. 저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합니다. 이기가 갈라지기 전의 것을 도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도가 이기로 갈라졌다면 도는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2-2) 노자는 본질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有와 無의 대립 관계로 세상을 파악하는 비본질주의자입니다.

 

어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장자를 연결시키는 것도 웃길지 모르겠습니다. 비본질주의/비이성주의의 부류의 명칭으로 저는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노장사상은 일부는 노자, 장자와 관련이 있고, 별개의 내용도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 역시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의 주장이 제 분류로는 다른 곳에 속하기도 합니다. (동양사상은 서양사상보다도 더 명확한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와 혜시의 ‘범애만물 천지일체 汎愛萬物 天地一体 (만물을 다 같이 사랑하라. 천지는 한 몸이다)’라는 것은 장자와 관련된 것이지만 저의 정형에는 디오게네스-양주주의에 해당합니다.

 

 

저는 과거에 플라톤주의자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플라톤-노자주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주의라고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픈 개념이 아니라 플라톤의 책에 나온 내용 그대로를 신봉하는 의미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제가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따라서 저의 플라톤-노자주의는 본래 플라톤, 노자가 주장했던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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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가 만든 개념을 예화로 설명드리지요.

 

예화 ; 동전을 100번 던졌더니 앞면이 51번, 뒷면이 49번 나왔다.

 

이 예화에 대해 플라톤-노자주의는 확률 1/2에 맞춰 거의 반에 가까운 횟수로 앞면, 거의 반에 가까운 횟수로 뒷면이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자는 앞면과 뒷면이 거의 반반씩 나와 확률 1/2을 사건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디오게네스-양주주의자는 두 주장을 (반대하기보다) 무시한 체, 비록 앞뒷면이 각각 반반 나왔다고 하여도 위 사실로 5번째가 앞면이었는지, 101번째가 뒷면이 될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저의 정형의 핵심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명은 은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푸른기침 님의 글을 통해 부적절한 은유였다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1) 플라톤-노자주의자 ; 세상에 앞서 원리가 먼저 존재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세상(multiverse)에서 우리와 다른 소수prime number가 존재할 수 있는가?)

2)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 세상이 있고 나서 원리가 생겼다.

3) 디오게네스-양주주의 ; 세상에는 원리(이성)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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