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31128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서평 별점 ; ★★★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데, 유용하지만 내 성격상 탐탁치 않은 것이 바로 ‘굴절 적응’이다. 새의 깃털은 나는데 중요하지만 시작은 보온이었다고 한다. 소시지를 만들어 먹으려 소시지 기계를 만들었는데, 정작 소시지 재료가 없어, 햄 재료를 넣어 햄을 만들어 먹었다면 이도 굴절적응이 될 수 있다. 플라톤-노자주의자인 나는 목적 이외의 사용에 반감은 없지만, 아예 목적 전도는 불편하다. 보석이 박힌 칼이 있다. 가격으로 수억 원이라고 하자. 이 칼을 칼로서 사용할 수 있을까? 아마 장식용만으로 사용되거나 자산으로 이용될 것이다. 가오리에게는 불만이 없다. 그러나 넙치, 가자미에 관해서는 불만이다.

 

종교에 관해 신God을 빼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이 잘 안 된다. 그것을 핵심이라고 부르든, 본질이라고 부르든. 만약 종교가 인간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 작용의 산물이라면, 이것은 오류다. 신을 빼고 종교의 긍정적인 면만 고려한다면 굴절 적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 생각이 확산되면 종교의 긍정적인 면이 유지될지도 의문이다. 만약 신이 없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신이 있다고 기만한다면, 인仁(책임윤리)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의義(책임윤리)에는 어긋난다.

 

* 밑줄 긋기

p51 적절한 행동 규범이 진지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데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를 점차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p69 바보들의 축제 ; 이는 우리의 두 번째 본성이며 인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을 최소한 한 해에 한 번은 자유롭게 분출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p90 어떻게 하면 인류는 평화롭고 바람직하게 서로 잘 어울려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불변의 법칙, 이른바 선행에 관한 불변의 법칙을 우리는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p132 학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기술 - 추상적 관념과 우리의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강조, 텍스트에 대한 명료한 해석, 전체보다는 발췌에 대한 선호-이야말로 종교가 주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p137 웅변가는 증명하고(프로바레), 즐겁게 하고(델렉타레), 설득하는(플렉테레) 3중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키케로

p151 뉴스의 위상은 우리의 삶이 계속해서 결정적인 변화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는 묵언의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현대 역사의 두 가지 추진력, 바로 정치와 기술이다.

p162 인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코르푸스(몸)’, ‘아니무스(정신)’, ‘스피리투스(영)’

p174 궁극적으로 모든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시간을 절약하고 오류를 방지하는 것이다. ; 사교육은?

p175 기존의 어떤 주류 세속 제도도 우리에게 삶의 기술을 가르쳐 주는 데에 명백히 관심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p196 세속 시대는 진보에 관한 이야기에 정말 비합리적일 정도로 전념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세 가지 거대한 변화의 원동력에 대한 구세주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과학 기술 상업이다.

p198 기독교는 정치가 완벽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고, 충돌이나 논란이 없는 결혼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고, 친구가 항상 충직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이 평범한 지상에 건설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다.

p201 우리에게 경배의 대상인 천사와 관용의 대상인 연인을 마련해준 것만 봐도, 신앙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p203 비관주의적인 세계관이라고 해서 삶에서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가끔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소한 성공에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p206 하느님을 빼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적어도 낙담한 사람들이 ‘함께’ 운다는 사실이다.

p210 그 책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하는 테마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욥기는 정작 이 질문에 대해서 간단명료하면서도 신앙에 근거한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p214 좌절과 재난의 순간에는 우주적 관점을 차용하고, 또는 상황을 다시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즉 그의 유명한 시적인 조어에 따르면 ‘수브 스페키에 아에테르니타니스 sub specie aetermitatis’, 즉 “영원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p215 종교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초월하는 어떤 상징이며, 또한 우리의 하찮음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교육이다. ; 근거?/물론 우리가 사물을 항상 ‘수브 스페카에 아에테르니타디스’하게 바라볼 수만 이싸면 정말 이상적이다.

p268 우리는 주위의 사물에 대한 고조된 감성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길이 머무른 모든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p270 가톨릭이 아름다움을 존경하게 된 근거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 플로티노스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간다./아름다움은 사랑, 신뢰, 지성, 자비, 정의 같은 미덕을 암시하고, 우리를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p276 어떤 장소에 들어갔을 때, ... 우리는 흔지 않으면서도 위안이 되는 은혜를 느끼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그리고 불쾌하지 않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p280 지식을 장려한다는 명목보다는 경외감을 일으킬 목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며, 그 실제 가치보다는 오히려 치유적이고 관점을 제공하는 힘을 강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p294 그들의 적들은 ‘제도’를 선택했다.

p297 제도로서의 종교가 주는 기본적인 교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규모의 중요성, 그리고 돈과 지능과 지위를 적절하게 모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해관계의 중요성이다.

p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트가 남긴 유산이라면, 세속 사회에도 그 나름의 제도가 필요하다는 그의 인식을 들 수 있다. 즉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의 필요-정치, 가정, 문화, 직장 등이 이미 담당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에 부응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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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1-2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와 굴절적응이라...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너무 일방주의적이다. 반대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의 일방주의를 공격하면서 같은 스탠스를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꽤나 당황스럽습니다. 그나 저나 이 책도 계속 만지작 거리는 책이긴 합니다.

마립간 2013-11-29 07:43   좋아요 0 | URL
저도 유신론(주로 개신교)자들과 무신론자들 모두와 이야기하지만 양쪽 모두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양쪽의 절충은 없다고 봅니다. 휴전/휴면 같은 상태는 가능해도요. 신이 있고 없고는 배중률이 적용된다고 판단하니까요. 물론 신의 정의에 이견이 있어 이에 따라 다양성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지오다노 브루노의 이야기를 듣고,
성경과 예수님을 의지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무섭고 교회는 믿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저의 교회에 대한 불신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