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21209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은 모험> 서평별점 ; ★★★

 어느 분이 저에 대하여 평가하시기를 가치판단에서 너무 정형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판단에 저도 동감을 합니다. 저는 방법적인 기술로 가치판단에 있어 정형화를 하고 이 정형화가 사실/진리를 반영하지 못하면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오류를 통해 인식의 확장이 있게 되고 정형된 것은 교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진리에 접근하게 됩니다. (이 책의 표현대로 하면 대붕大鵬이 쓱 지나간 것이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서평에서 동양 주리론의 리理는 수학과 동치라고 이야기하고, 주기론의 기氣는 물리와 동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문장에 대해 알라딘표 악성 댓글을 기대했는데, 없군요.) 처음에는 은유라고 표현했는데, 한 동안의 독서를 한 지금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여 지금은 동치라고 이야기합니다.

 

* 독서일기 2012 10 23 http://blog.aladin.co.kr/maripkahn/5921598

* 마립간의 철학적 관점을 설명하는 핵심어들 http://blog.aladin.co.kr/maripkahn/3459932

 

이와 같이 비유되는 것에 노자는 플라톤을 은유한다고 하고, 장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은유한다고 합니다. (아직 동치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고요.)

 

제가 노자, 장자, 노장사상과의 접촉은 언급한 것과 역순이었습니다. 국사 시간에 ‘고구려의 국교가 도교였다.’ ‘사신도는 도교 사상의 반영이었다.’ 등. 도교는 ‘노장사상’이고 같은 말로 ‘황로사상’, ‘신선사상’이 있습니다. 이 도교에서 불로장생의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면 문화로서의 도교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여기에 철학으로 도교를 접하게 된 것은 장자의 해설서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털 끝에 놓인 태산을 어이할까>, <눈썹에 종을 매단 그대는 누구인가> 3권입니다. 이 책을 읽을 당시의 갈등은 혜시의 논리학과 장자 철학의 통합이었습니다.

 

정말 저의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노자와 21세기, 1, 2, 3>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노자가 장자와 어떻게 연결되는 지, 그리고 노자-장자와 노장사상 어떻게 연결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때 저의 새로운 판단은 노자, 장자, 노장사상을 분리하는 새로운 가치판단/정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새로운 정형에서는 노자는 플라톤에 은유되고, 장자는 아리스토텔레스, 노장사상은 디오게네스와 은유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플라톤-노자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도道/이데아가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도/이데아에 잘 은유되는 것이 ‘수학’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세상에서 도/이데아를 축출합니다. 잘 은유되는 것이 진화론적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토끼rabbit는 토끼의 도/이데아/본질이 있고 이로 인해 토끼라는 동물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토끼의 모습은 변할 수 있고, 안드로메다 은하의 별에서는 다른 토끼?가 토끼로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노자나 아리스토텔레스-장자나 방식에 있어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서 위로의 차이가 있지만 도/이데아/본질/진리를 축으로 삼고 있지만,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은 도/이데아/본질/진리가 무의미가 하거나 거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잘 은유되는 것은 삶(개인의 삶), 인간의 존엄성(인류의 삶), (일부의) 예술입니다. 이것들에 관해서는 마치 본질인 것 같이 설명을 붙일 수 있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설명없이 처음부터 총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합니다.

 

이와 같은 정형에서 플라톤-노자는 공통점, 보편성, 추상성, 필연성, 연역법에 중점을 두게 되고 수직적 가치판단의 성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차이점, 특수성(개별), 구체성, 우연성, 귀납법에 중점을 두게 되고 수평적 가치판단의 성향을 갖게 됩니다.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장자보다 극단적인 다양성, 평등성을 강조합니다.

 

저의 위와 같은 판단이 보편타당성을 갖는지 알 수 없기에 (동치라는 판단까지 못 가고) 은유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자에 대한 저의 판단이 맞는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읽으며 가늠해보았습니다. 최소한 강신주 선생님의 잣대로 판단하면 저의 은유는 크게 수정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책을 읽는 몇몇 대목에서는 장자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디오게네스에 가까웠구나라고 느꼈습니다.

 

* 밑줄긋기

p 67 결국 마지막에는 ‘논증’이 아닌 정서적인 ‘설득’의 과정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p 109 아비투스habitus/무의식적인 구조

p 112 아장스망agencement/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p 117 공자는 땅에서의 이간의 삶은 예라는 절대적인 규범에 의해 영위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p 119 이제 우리는 장자에게서 성심이란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성심은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문제는 타자를 만났을 때, 다시 말해 이질적인 공동체와 조우했을 때 발생한다.

p 122 초월에서 포월로

p 125 장자의 주장은,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따라서 어떤 타자와도 직대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p 134 그 초월적 가치들은 우리 삶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p 135 더 나아가 상에 대한 욕망은 선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그리고 벌에 대한 공포는 악에 대한 죄의식으로 내면화된다./마침내 이런 방식으로 특정 공동체의 규칙을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인 가치로 수용하게 되면,

 

$ 디오게네스-노장사상대신 ‘디오게네스-양주’로 하는 것을 고려해봐야겠다. 도교와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도교/노장사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야합한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 심재心齋, 허虛 ;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논리적으로 옳다. 그러나 채운 후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사후확증편향이나 순환논리모순이다./창의적 생각이 창의적 발견-발명을 가져온다. 그러나 창의적 발견-발명이 있기 전에 그것이 창의적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초월적 가치가 우리의 삶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2-12-13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자와 장자를 읽었는데도 아, 어렵다... 이러면서 읽고 갑니다. ^^
마립간 님, 좋은 겨울 보내세요.
공부 좀 더하고 오겠습니다. ㅋ

마립간 2012-12-13 15:18   좋아요 0 | URL
pek0501님,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퇴화된 우뇌와 거울신경으로 좌뇌만 의존해서 살기 때문에 정형화하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 있습니다. 장점도 있지만 그 장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pek0501님도 성탄절, 연말연시 즐겁게 보내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