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와 주자

 

 공자에 대한 저의 인상은 부정적인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인데, 저는 자연 철학을 인문 철학보다 더 높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다음 문장은 조심스럽습니다.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고등학생 교양 수순으로) 논어를 읽은 후 더 실망했습니다. 오히려 저는 도덕경이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교를 가볍게 여기거나 매력이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자와 공자 중에서 선호하는 한사람을 택하고자 한다면 주자입니다. EBS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은 공자는 나(도올)보다 훌륭한 사람이지만 주자는 나와 동급이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철학에 문외한인 제가 도올 선생님이나 공자나 주자는 모두 대단한 사람이라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도올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주자보다는 공자가 철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한자/한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면 한문은 (다른 어떤 언어/글자보다도) 이중적, 중의적, 애매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으로부터 원래에 의미와 다른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 부부유별 http://blog.aladin.co.kr/maripkahn/571215

 

 이런 해석의 확장을 통한 개념의 변경은 꼭 인문학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질량의 보존의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확장된 것과 같습니다.

 

* 호흡의 정의 http://blog.aladin.co.kr/maripkahn/469975

 

 공자가 저에게 주는 강력한 매력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朝聞道, 夕死可矣.”의 가치관입니다.

 

<관중과 공자> p153

공자가 말했다.

“사(자공)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도리로써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다. [一以貫之]”

 

 제가 판단하는 바는 공자가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자아의 정체성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폴리스 아테네 밖으로 확장하려 했던 것이나,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의 말씀에 비하면 공자의 보편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생각보다 형이하학形而下學적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느꼈습니다. (형이상학의 반대말은 유물론이나, 자연학(physics)이 맞겠지만, 여기 문맥상의 딱 적합한 어감은 형이하학으로 속어를 그냥 사용합니다.) 이런 형이하학적인 것을 형이상학metaphysics적 사고로 격상시킨 것은 주자라고 생각합니다. 주자학에 대해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의 붕당 서인들이 주자에 대해 절대시 하면서 이후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제 페이퍼의 ‘부부유별’이나 ‘호흡의 정의’에서 중간의 해석에 고착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자의 잘못은 아닙니다.

 

 廐焚 子 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 마구간에 불이 났었는데, 공자께서 퇴근하셔서 "사람이 다쳤느냐?"하고 말씀하시고, 말은 물어 보지 않으셨다."

 

 주자의 해석 ; 공자가 사람의 안부는 묻고 말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은 사람 생명을 귀히 여기고 말馬의 손실은 재산의 손실로 가벼이 여기 묻지 않으셨다.

 다른 해석 ; 공자가 말이 다쳤는지 물으시려고 했다. (또는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물으셨다.) 공자께서 물으신 연유는 말馬도 생명이라 다치지를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공자는 신분 질서를 중요시 여겼던 분으로 사람 사이에서도 차별이 있었는데, 동물의 생명 가치를 그렇게 높게 여기셨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원전으로 훼손하자는 것이 아니고 다각적인 해석으로 통해 보편성[一以貫之]을 확립할 수 있는데, 그 본격적인 일을 주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와 논어를 잘 모르는 저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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