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는가.
그 곳은 지낼만한 곳인가?
지난번에 글을 쓴 것이 자네를 떠나보낼 때이니 벌써 일 년이 지났구먼. 무정하다고 하지 말게나. 외국으로 이민을 간 동생과는 결혼 전 10년 동안, 전화 통화 10번도 못했으니.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일세.
알고 있겠지만 자네가 남긴 글로 두 권의 책이 출간되었네. 두 권 모두 구입했지만 리뷰 묶음 책은 한 참 뒤에나 읽게 될 것일세. 200권의 책 중에서 제목을 보고 ‘읽었구나’라고 알 수 있는 책이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노란 방의 비밀>과 <813의 비밀> 정도이니, 그마저 줄거리나 트릭이 기억나지 않네. 몇 권이라도 읽고 자네의 리뷰를 읽으려 하네. 내가 추리소설을 읽지 않았고, 읽지 않는 책의 리뷰는 선입견을 갖을까봐 웬만하면 읽지를 않네.
이전에 내가 읽은 자네의 글은 대부분이 페이퍼였네. 출간된 또 다른 한 권은 이 페이퍼를 추린 것일세. 나는 이미 블로그에서 대부분을 읽었던 글이어서 친근감도 느꼈고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났네.
지금 돌이켜 보면 2000년대 초반에 우리 모두는 제 정신이 아니었던 같아. 자네도 그렇고 플***, 진**, 평** ***님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알라딘에 남겼으니. 그런 진솔한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진솔하게 쓴 글을 진솔하게 느끼려면 소통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앞으로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고, 자네가 남긴 글로 인해 몇 가지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하네.
우선 내 가족의 무병無病함을 감사하네. 물론 자네는 스스로 어려움을 잘 이겨냈고, 자네의 가족 역시 불편함 그 이상의 어려움이 없이 지냈지만. 질병을 좋다고 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에 대해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이 매우 근시안적, 협소한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하네.
그리고 어려움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네. 그 어려움이 가족 중에 누가 아프던, 아니면 다른 어려움이라도 말일세. 지금은 떠난 전 직장에 상사는 한 분이 계셨네. 그 분은 우리나라 1970년대의 전통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네. 남자는 일로써 사회에서 성공하고, 아내는 내조를 하고. 아이들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는 권위가 있고. 그런데, 그 분의 아이가 질병을 갖고 있는데, 그 분도 좋은 분이고 가족을 사랑하는 분이지만 그 분의 생각에는 무언가 어색한 점이 있었네. 내가 책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그 분에게 선물로 준비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주저주저 하다가 끝내 선물조차 하지도 못했네. 그 분을 자네와 비교하니 그 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네.
나는 블로그에서 자네의 글을 읽을 때, 그리고 자네의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한 용기를 얻었네. 고맙네. 이 세상에 극복하지 못 할 난관이 몇 개나 될까? 설령 그런 난관과 맞닥뜨린다고 해도 희망과 용기를 갖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자네가 보여 주었네.
내가 이런 글을 쓴다고 해도 자네를 온전히 공감했다고 생각지는 않네. 알다시피 나는 직업상 많은 사람과 이별을 하고 또 이별에 의해 남겨진 이들을 많이 보아 왔지만 그들을 이해할 뿐이지 공감까지는 아니었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가치판단에 ;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이 한 번도 사랑 못해 본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는 판단은 사랑의 상처를 잘 모르고 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지. 내가 그대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나 한 걸까?
예전 블로그에 글을 남길 때는 깍듯한 존댓말을 썼는데, 이렇게 하게체로 글을 쓰는 것도 정겹네 그려. 어째든 자네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어 반가웠네.
사람이란 것은 언젠가는 그 곳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 않나. 나중에 보세나.
* 밑줄긋기
p 19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