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 25쪽


이 책의 표제작이다. 스물 아홉 청년이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 용광로에 빠져 숨졌다. 당연히 시신은 찾지 못했다. 2010년의 일이다.


어찌 됐건

생을 마친 종이를 부활의 초입까지 나르는 일은

늙은이들의 몫이 되었다


언덕을 오르던 정오

말보로 상자는 납작해진 주둥이로

브라질 숲에서 왔노라 자랑을 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작에 고향을 잊은 노인은

의심스러운 저울에 무거운 시선을 보태느라

눈이 시렸다

영락없는 푼돈이지만

당분간 목숨은 그럭저럭 붙은 셈이다


장차 자신의 장례비를 외투에 넣고 돌아선 그는

곤궁한 처지를 푸념하는 대신

그깟 외로움 하나 견디지 못한

아들놈의 죽음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째서 사람은 부활하지 않는가, 하고


<부활>  - 27쪽


밀린 집세를 남겨놓은 채 생을 마감한 송파 세모녀도 함께 떠올랐다. 여름은 더 더워지고 겨울은 더 추워지는데 곤궁한 살림의 가난한 이들은 한숨이 더 깊어진다. 


높은 양반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산업역군이란다

나의 일터는 경제의 최전선이고

전선에서는 다들 죽는 거란다

일 년에 이천 명씩

다치기도 부지기수


그런 거란다

원래 그런 거라는데

억울하다

석연치 않다


나는 역군 아닌데

종현이 아버지인데

지수 씨 남편인데

썩 괜찮은 아들인데


나는 사람인데


<나는>  - 33쪽

아들 같아서 그랬다고.. 공관 사병을 종 부리듯 했던 별 네개 장군 부부가 생각난다. 누가 당신 아들 취급을 원했다고. 걸핏하면 자식 같아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나. 그건 성추행범들이 주로 하는 변명들이지.


고통에 절규하는 새끼 곰을 죽이고 자살한 어미 곰


최근 영국의 '데일리메일'은 중국의 한 농가에서 산 채로 쓸개즙을 채취 당했던 곰 모녀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어미 곰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새끼 곰을 죽이고, 벽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받다 죽었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문제가 된 중국 북서부의 한 농장에서는 곰의 쓸개즙을 채취하려고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호수를 꽂아 수시로 쓸개즙을 뽑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는 농장 일꾼이 한 새끼 곰을 쇠사슬로 묶어놓은 채 쓸개즙을 뽑아내고 있었다. 이날 새끼 곰의 절규에, 어미 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곰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해 철창을 부수고 탈출했고 새끼 곰에게 뛰어갔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달려온 어미 곰은 새끼 곰의 쇠사슬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쇠사슬을 끊을 수 없었던 어미 곰은 새끼 곰을 끌어안고, 질식시켜 죽였다. 자신의 새끼 곰을 죽인 뒤, 이 어미 곰은 스스로 벽으로 돌진했고 머리를 부딪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2011.09.02  - 48쪽


축생문으로 들어가 산 채로 쓸개즙을 죽을 때까지 착취 당하는 곰으로 다시 태어나야 마땅한 사람들. 어미 곰의 절규가 절절히 들린다.


고향 떠나온 지 반백 년

시멘트 독에 잘린 발가락

휘청이는 몸으로

사랑도 힘에 부치어

자식 하나 남김 없음이 서러운데

본전 생각에 박제라니,

하지 말아라

그만하면 됐다

아프게 가죽 벗겨

목마르게 말리지 말아라

먼지 앉고 곰팡이 필

구경거리로 세워놓고

애도니 넋이니

그거 말장난이다

사라 바트만처럼

사무치게 그리웠을 

아프리카

흙으로


<고리롱 >  - 51쪽

서울동물원 인기 스타 고릴라가 숨졌다. 사람 수명 80~90세에 해당하는 49년을 살았으나 노환으로 새끼 고릴라 하나 없이 숨을 거뒀다. 의료팀은 숨진 고리롱에게서 인공수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게다가 표피와 골격은 박제 처리를 해서 일반에 공개한다고... 그래서 동물사랑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워줄 계획이라고... 뚫린 입이라고 말도 잘하는구나. 욕심이 배를 뚫고 나오는구나. 참으로 독하다. 


우리 반 십육 번

박정호가 죽었네

영어학원 건너려다

뺑소니를 당했네


레커차 달려오고

경찰차 달려오고

사이렌 요란한데

그 애의 텅 빈 눈은

먼 하늘만 보았네


박정호가 죽었어요

훌쩍대는 전화에

울 엄마는 그 아이

몇 등이냐 물었네


<학원 가는 길>  - 87쪽


한참 전 일이다. 조카가 백점 맞았다고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책 집까지 뛰어왔다. 잘했다고 축하부터 해줬으면 좋겠는데 언니는 제일 먼저 이렇게 물었다. 너네 반에 백점 몇 명이야? 


친구 동생이 죽었다는 말에 엄마는 아들이냐 딸이냐고 먼저 물었다. 그 다음엔 교회 다니냐고 물었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내린다는 말보다

온다는 말이 좋다


너도 눈처럼 

마냥 오기만 하여라


<눈이 오네>  - 131쪽

서럽고 서러운 글들 속에서 모처럼 방긋 웃게 해주는 싯귀였다. 눈처럼 너도 마냥 오라니... 


봄날에는 떠나지 말자

어린 순경 코 찌르지 않게

동짓날 새벽에 떠나자

더웠던 양

홑이불 제쳐놓고

창문 활짝 열어놓고

보일러에는 열흘 치 기름을 남겨놓자

노인데, 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하게


머리맡 일기장에는

살 만큼 살았다는 양

복에 겨운 푸념을,

제일 뒷장에는

복지사 미안해하지 않게

천상병의 귀천을

그러나 쓰다 말자

꼭 떠나려던 것은 아닌 듯하게


그런대로 세상 살 만했던 양

새끼들 욕먹지 않게


<벼랑에서>  -133쪽

강풀 작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떠오른다. 치매 걸린 아내 병수발 하다가 함께 먼길 떠나기로 결심한 노인이 자식들 욕먹지 않게 밀봉했던 테이프 미리 치워달라고 부탁했던 것... 씁쓸하다.


62세 치매 아내 10년째 웃음으로 돌보는 박종팔 씨


(전략) "처음엔 잘못한 학생 혼내듯 했는데, 하루는 아내가 '당신 말을 이해했으면 내가 왜 그렇게 했겠느냐. 모르니까 다른 걸 따지'라고 하면서 서럽게 울더라고... 마음이 철렁했지. 그다음부턴 칭찬만 했어."

박씨는 아내를 보살피면서 터득한 '치매 환자와 함께 잘 사는 법'의 핵심이 바로 '칭찬'이라고 했다. 박씨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를수록 나는 지치고 아내는 위축됐다"며 "'잘한다', '예쁘다' 같은 칭찬을 많이 해주면서 서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3.03.10  -140쪽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세상도 맴맴 돌아

제자리로 와버렸다

진화한 것은 욕망뿐


십칠 년 매미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매미, 너도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뭍을 밟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양보해다오

사람이 울 차례다


<매미에게>  - 189쪽


댓글 시인 제페토를 내가 알게 된 게 이 시 때문이다. 양보해다오 사람이 울 차례다....ㅠ.ㅠ

선플달기 운동 요란하게 하던 때가 있었는데, 인터넷 댓글을 예술로 승화한 사람도 나왔다.

그의 시가 마음에 닿는 것은 그 속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착취당하고 서러움 가득한 사람과 생명들...

양보해다오. 사람이 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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