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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ㅣ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평점 :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8쪽
귀퉁이
세 시간 동안 꺼져 있었다 나는 자명종 시계보다 10
분 늦게 일어났다 현기증이 결근을 유혹했지만 허겁지
겁 봉제공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미싱들이 여성용 내
의를 쉴새없이 만들어냈다 나는 포장대 위로 올라온 내
의를 여덟 시간 동안 기계처럼 상자에 집어넣은 후 그
것들을 창고로 운반했다 트럭이 오면 제품을 실어보냈
다 일과는 늘 그렇게 끝났다
그날도 성냥개비처럼 버스를 빠져나와 빈방으로 퇴근
했다 비어 있어야 할 방안엔 현기증이 들아와 앉아 있
었다 신경 쓸 힘조차 없었다 윗도리를 막 벗으려 했는
데 뭔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망치질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모난 곳이 없었으므로 정을 맞아야 할 이유
가 없다고 우겨댔지만 현기증은 막무가내였다 넌 사각
형의 귀퉁이야! 진작에 떨어져나갔어야 했어! 망치질
은 멈출 줄 몰랐다 내 몸의 많은 부분이 패어져나갔다
난 쓰러진 채 중얼거렸다 그래 난 떨어져나가야 했을
귀퉁이에 불과해
그제야 현기증이 창을 열고 나갔다 아침이 걸어오고
있었다 - 30쪽
거미. 2
한달 만의 식사다
나방은 즙이 많아서 좋다
위턱과 아래턱을 놀린 지 오래여서
입이 좀 뻐근하다 집주인이 돌아온다
저 남자는 시를 쓴다
한달 전, 저남자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게을러서
화장실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내 집을
빗자루로 걷어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간만의 식사 탓일까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꾸 신트림이 난다
밥 먹는 내 모습을 처음 보았겠지, 남자가
칫솔을 문 채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날개라도 한쪽 떼어줄까
남자도 나처럼 오랫동안 굶었는지 깡말라간다
생각하면 저 남자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 곳에 들어 올 때마다 지금처럼
내가 잘 있는지 먹이는 언제쯤이나 잡게 될런지
쳐다보곤 하던 따뜻한 눈길, 알기나 할까?
남자가 아픈 배를 누르며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양치질을 하다가 욱욱거릴 때면 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내가 대신 뒤틀려주고 싶었다
남자가 알몸을 씻은 날은
주린 아랫입에 손가락을 물려 또 다른 허기를 달랬다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것이다 - 32쪽
섬
출항하기 직전에야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풍경을 오리기에 바빴다 찰칵찰칵,
앞다투어 가위질을 하는 통에
바다는 금새 너덜거리는 신문지조각으로 변했다
저기요 잠깐만 비켜줘요
뱃머리에 서 있던 내 신체의 일부도
오려져나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오려져나간 오른팔로 담배를 피웠다
뻥 뚫린 해가 연기를 빨아마신 뒤
힘없이 떨어져 젖었다
겹겹이 잘려지던 바다로 배가
천천히 빨려들어갔다 공기방울처럼 떠오르는 섬
그 섬에 닿으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멀미에 시달리던 나는 몸을 움츠렸다
속이 울렁거려 눈조차 뜰 수 없을 때
배는 이미 그 섬에 도착해 있었다
혼몽했던 나는 맨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짙은 안개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앞서 내려 걸어가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을 뿐
섬을 떠나고 있을 배조차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깔려 있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을 즈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어느 곳으로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젠장, 바다를 밟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파도에 휩쓸려 안개섬을 빠져나왔을 때
탁구공처럼 떠오르는 해가 막 뭍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안개섬과 앞서 내린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동안
허우적거렸을 팔이 심하게 결렸다 - 38쪽
참새 / 박성우
1
봉제공장 안에서 그 참새는 바빴다
미싱기술이 없었으므로
옆구리합봉, 소매부착, 어깨끈달이 언니들에게
원단을 날라야 했고 실을 날라야 했다
그 참새는 문이 열려 있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가지 못했다
화장실에 박혀 눈이 퉁퉁 부어 나오기도 하던
스무살도 안된 그 참새는
안마시술소가요주점여인숙모텔룸싸롱간판들에
한번쯤 앉아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단다
왜나고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답이 있다
봉급날이 제일 싫어요
2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저 참새는 미싱사다
어깨끈달이,
사람들은 저 통통한 참새를 이렇게 부른다
고급 속옷의 어깨끈 봉합은 저 여자의 몫이다
어깨끈달이는 생리를 하지 않는다
그의 나이 스물셋
어깨끈달이는 토요일 오후가 없다
해태 브라보콘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어깨끈달이의 손가락이 하얗다
바늘에 찔려 반창고가 감진 검지
휴식시간엔 홀어머니 전화번홀 눌러야 한다 - 64쪽
생솔
눈은 언제나 치매밭골이 먼저 녹았다
구슬치기에 소질이 없던 나는
춘란이 유난히 많은 그곳에 올라 겨울방학을 보냈다
빨치산이 살았다 하여 아이들은
내 뒤를 따르지 않았지만
꼭, 엄마 치맛자락처럼 생긴 그곳은 혼자 가도 좋았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
그해 겨울도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집엔 여느 집처럼 외양간 옆에
장작더미가 없었고 낯익은 얼굴들이
아버지의 소식을 묻곤 했다
정지에서 시래깃국 끓이던 셋째 누나는 가끔
생솔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움츠려 있었다
한번은 연기가 맵다고 투덜거리는
내 등을 한참 동안이나 안고 있었는데
불에 던져진 생솔보다 더 끈적이는 송진을 흘렸다
성냥개비가 되어가는 줄 모르는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삼베 품을 팔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남의 집 반찬에 익숙해져 갔다
국민교육헌장 외우기에 좋았던 치매밭골,
그곳에선 솔방울 반 포대 줍는 동안
외우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갈퀴나무를 하기 위해 그곳에 올랐다
갈퀴나무 흩어지지 않게 생솔가지 꺾어
칡넝쿨로 묶어오곤 했다
서울로 돈벌러 갔던 큰누나 내려오던 날
성적표를 본 누나는 부지깽일 들었지만 나는
따순 물 끓이며 생솔에 묶여진 갈퀴나무
아끼지 않았다, 밥 안치던
큰누나는 눈 속에 생솔을 태우고 있었다 -66쪽
누에
누에가 안방을 가져갔다
뒹굴며 숙제하기에 좋았던 마루는
뽕잎을 썰거나 다듬는 장소로 적당했고
우리는 광을 고친 방에서
둥근 잠을 자면 둥근 꿈을 꾸었다
누에가 가져다줄
모나미 연필 한 다스와 새 가방이
누나 입가에서도 웃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기에도 턱없이 비좁은 방이었지만
갓 따온 뽕잎에 엎드린 누에처럼
여덟 식구 모두 싱싱한 잠을 잤다
막내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통통한 누에는
겨우 연필로 뭉개진 뽕잎을 먹어야 했다
청소 시간에 주운 초록색 크레파스를 내밀던 날,
막내는 그것을 받자마자 그림일기를 썼다
큰누나는 훔친 것이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내 뒤통수를 측은해했다
누에는 실을 토하기도 전에 안방을 비워주었다
누엣구더기 때문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누에섶에 불을 질러
우리들의 꿈도 함께 태워주셨다
그날 밤, 만취한 아버지는 누운 채로
명주실을 밤새 토해냈다
둥글고 거대한 고치 하나가
다음날 오후까지 이불에 덮여 있었다
막내는 더 이상
그림일기장에 누에를 그려넣지 않았다 - 74쪽
강천사에서
흙길이다
한적한 진입로를 따라
속살 훤히 보여주는 피라미떼,
폴짝폴짝 뛰어 햇살 감아 올라간다
물살이 거칠어서
이 길 선택했을 저 무리들은
잘 닦인 길은 거슬러오르지 않는다
길은 넓을수록 따분하다
어느 절이었을까
아스팔트로 문 열던 그 절은
흉흉한 안팎의 소문들이 귀를 먹게 했다.
극락교 지나온 사람들은
대웅전에서 합장을 한다
간절한 소원이 누구에게나 한가지쯤 있는 법
허나, 일찌감치 세상에 단풍든 나는
빌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냥 지나친다
내 육신 외의 것들에 대하여
손을 모아본 적이 있었던가
운동화가 더이상 커지지 않기 시작한 뒤에도
긴박한 속보조차
숭늉처럼 쉽게 소화시키지 않았던가
쉰내 나는 몸, 씻어보자는 속셈인가
약수 한대접 거뜬히 마신다
길다란 쇠줄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건넌다
한발만 움직여도 흔들린다
벼랑도 마음을 닮은 걸까
올려다볼 때보다
내려다볼 때 더 위태롭다 - 82쪽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 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92쪽
시인의 말
쓸쓸하고 지루한 날들이었지만
고만고만하게 견딜 만했다.
애벌레의 상태로 첫 시집을 묶는다.
이제 내 손을 떠나는 시들이므로
나비가 되든 나방이 되든 어쩔 수 없으리.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전히 나에게 몸으로 책을 읽히시는 어머니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02년 8월
석상마을에서 박성우 - 124쪽
어디선가 시 한구절이 가슴에 탁 걸려서 보관함에 담아두고, 그리고 시집을 한 권 사면, 내가 마음에 들었던 그 시 하나만 좋을 때도 더러 있는데, 이 시는 시집 전체가 다 좋았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의 정서적 울림이 내 가슴을 동하게 해서 그런 것일 텐데, 가난한 시인의 노래에 내 걸음이 멈춰섰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배부르면 안 되라는 법 당연히 없고, 그들도 넉넉한 환경에서 아름다운 작품 활동하면 더 좋은 것일 텐데, 어쩐지 배부른 시인은 시인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선입견일 테지.
날이 너무 더워서 낮동안에 집에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뛰쳐나가게 된다. 만만한 게 극장이지만 그밖에 전시회나 공연도 두루 관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외출하면 커피 일잔하러 카페에 들르기 마련. 두꺼운 책은 가방이 무거워서 가볍게 시집 한권씩 들고 외출하고 있는 요즘이다. 가방은 가볍지만 그 책의 깊이는 가볍지 않다. 음악도 꺼버리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기분이 꽤 좋다. 내일도 덥다는데... 내일은 또 어떤 시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