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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부터 추천받은 책이었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고 접해보지 못했던 터키 문학이어서 호기심이 동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색채의 강렬함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약간 기하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느낌의 이미지가 또 특별했다.
내 이름은 빨강... 이 책은 독특하게 시작한다. 서술 시점은 모두 1인칭이지만, 각 장마다 서술자가 바뀐다. 내 이름은... 나는... 나는.... 내... 이런 식으로, 나를 누구라고 지칭하는 자들이 모두 자기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나간다.
16세기 이슬람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 소설에서는 많은 세밀화가들이 등장한다. 우리로서는 낯선 이슬람 문화와 미술 양식인데, 낯선 것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파격적이다. 시작부터 한 남자가 죽는다. 죽은 남자가 시체가 되어서 죽은 채로 이야기한다.(그렇다고 좀비는 아니다.ㅡ.ㅡ;;;) 희생된 사람을 죽인 이가 다시 얘기한다. 이제는 죽은 이들의 친구, 동료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여러 사람의 화자가 저마다의 입장을 토로하며 이끌어가는데, 이런 부분은 "사람아 아, 사람아"의 형식과 몹시 비슷하다.
또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가 어떤 세속적 재물이나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현상과 세계가 깨어질까 봐(이들 세밀화가들은 인간 중심적인 유럽의 화풍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다. 동시대에 유럽은 르네상스 절정기를 지냈다), 그들이 전부라고 믿고 있던 체제를 고수하려고 하는 자들의 싸움이라는 것에서 "장미의 전쟁"도 같이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은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말이 많은 사람도 있고 말수가 적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1인칭 화법으로 이야기할 때는 각자의 캐릭터에 따라서 글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마치 연극에서 독백을 소리내어 말하더라도 무대 위 다른 인물들이 듣지 못하는 그런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그런데, 솔직히 나는 아주 탁월하게 재밌지는 않았다. 그것은 너무 낯선 것들이어서 쉽게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장애를 만났기 때문이다. 작품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내가 낯가림을 한 것이다. 독특하고 신비롭고 특이하기까지 하지만 내 입맛에 착착 달라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르한 파묵의 다른 소설 책까지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수작이지만 별 다섯까지 가지 못하고 넷에서 그쳐버렸다.
그래도, 날마다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가끔 시고 떫고 짭짜름한 다른 메뉴도 즐겨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목처럼 강렬한 소스를 듬뿍 쳐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