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백호는 청룡(靑龍)과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함께 우리나라의 사방을 지키는 사신(四神)이었다. 그중에서도 백호는 흰털 동물을 성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민족에게 더욱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다. 백호의 해였던 지난 2010년 출산 합계율은 1.23명으로, 평균 1.15명을 유지하던 당시와 비교해 급증했을 정도다.
동물원에서도 백호는 단연 인기 있는 동물이다. 새하얀 털을 가진 백호를 보고 어른 아이 없이 신기함에 탄성을 지른다. 그러나 오늘날 동물원의 백호는 신기한 외모와 달리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자연적인 교배가 아닌 근친교배로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백호는 알비노가 아닌 루시즘 돌연변이
흔히 백호는 알비노 동물과 혼동되기 쉽다. 정확히는 알비노증이 아닌 ‘루시즘’이라는 증상에 의해 태어나는 동물이다. 알비노와 루시즘은 둘 다 돌연변이지만 발생하는 원리와 증상은 확연하게 다르다.
동물의 유전자 중에서 털색과 관련이 있는 유전자는 5가지로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를 각각 A, B, C, D, E로 명명하고 구분했다. 그중에서도 알비노는 ‘C’유전자가 고장 났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C유전자가 고장이 나면 모든 색소를 만들지 못한다. 그럼 피부나 털은 흰색을 띠고, 멜라닌 색소가 없는 홍채에는 망막의 혈관이 그대로 비쳐 붉은 빛을 띤다. 알비노 동물의 일종인 실험실용 흰 쥐를 보면 털은 물론 온 몸이 하얗고 눈은 빨간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반면 루시즘은 발생과정에서 피부나 털, 깃털의 피부 세포가 색소 세포로 제대로 분화되지 못해 발생하는 증상이다. 색소를 아예 만들지 못하는 알비노와 달리 색소가 부분적으로 부족해 몸의 일부 털이 흰색으로 변하거나 원래의 색이 희미해질 정도로만 변할 수도 있다.
백호를 관찰해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보통의 호랑이라면 황토색이었을 부분의 털이 흰색으로 바뀌어 있다. 호랑이 특유의 검은색 줄무늬는 그대로 나 있고, 눈 색도 검정색이다. 말 그대로 황토색 털만 흰색 털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몇몇 호랑이는 털이 완전한 흰색이 아닌 살짝 노란 빛을 띠기도 한다.
■ 인간의 이기심으로 태어나는 흰 동물들
백호는 유전적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동물인 만큼 태어날 확률도 매우 낮다. 야생에서 백호가 태어날 확률은 벵갈 호랑이는 1만분의 1, 시베리아 호랑이의 경우는 10만분의 1로 매우 희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생에서보다 동물원에서는 백호를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확률적으로 매우 희귀한 동물이 동시대에 여러 마리가 살고 있으니 우리는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 이기심의 자화상을 보는 것이다.
백호의 탄생은 멘델의 유전법칙 중 ‘우열의 법칙’을 따른다. 부모 호랑이 모두에게 백호를 발현하는 열성 유전자(a)가 적어도 하나씩 있어야 백호가 탄생할 수 있다. 열성 유전자를 하나씩 가진 황호(Aa) 두 마리가 교배했을 때 백호(aa)가 태어날 확률은 25%다. A형과 B형인 부모가 만났을 때 O형인 자식이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호(Aa)가 백호(aa)와 교배를 하면 백호가 태어날 확률은 75%로 늘어나고, 백호끼리 교배를 할 경우엔 확률이 100%가 돼 무조건 백호만 태어난다.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백호를 많이 태어나게 하기 위해 백호끼리 교배하는 근친교배를 시행한 것. 그러다보니 최근의 백호는 다양한 유전병을 갖고 태어나게 됐다. 우리가 ‘언청이’라고 부르는 구개파열을 가진 채 태어나거나 사람처럼 지체장애를 앓기도 한다. 내반족과 척추측만증(척추 옆굽음증), 내장기관의 결함과 같은 질환이 대물림됐고 동시에 수명은 짧아졌다.
사실 근친 교배는 인간이 원하는 동물을 얻기 위해 오래전부터 여러 동물에게 행해져왔다. 대표 적인 예가 흰털이 특징인 몰티즈다. 원래 몰티즈는 흰색과 갈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의 털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초반 사람들은 흰털을 가진 동물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흰색 몰티즈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흰색 몰티즈가 많이 태어나도록 흰색 몰티즈끼리 교배시켰고, 현재의 몰티즈는 흰색 털을 가진 단일 품종이 됐다. 이외에도 흰쥐와 백사자 등 인간은 흰 동물을 더 많이 보고 싶다며 근친 교배를 시키고 있다.
■ 종 보존은 개체수가 아니라 다양성이어야
최근 근친 교배로 태어난 백호의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일부에선 백호라는 종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항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종 보존’은 단순히 개체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본성과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 습성을 그대로 지켜 주려는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노력은 선진국에서 먼저 실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1년 6월, 미국 동물원수족관협회(Association of Zoos and Aquariums, AZA)는 백호나 흰 사자와 같은 희귀동물의 번식을 금지했다. 그 이유에 대해 희귀한 형질을 내기 위한 인위적인 교배는 자연 생태계 전체를 봤을 때 비정상적인 행위이며, 동물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동물원에서 백호를 번식해온 행위가 ‘종보존’이 아닌 사람들의 눈을 충족시키는 ‘오락’을 위한 것이었다고 본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호주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원이 동물복지를 우선해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동물을 좁은 공간에 가둬 두는 방법이 아니라 동물의 습성에 맞는 환경을 제공해 최대한 야생 동물 그대로의 모습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동물복지규정을 정하고, 이를 지키는 동물원을 인증하는 제도를 시행중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이 인증을 받은 적도 자체적으로 만든 제도도 없는 실정이다.
이항 교수는 “인간에게는 신비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백호는 실제로 야생에서 살기 불리한 동물이다. 백호와 같은 돌연변이 동물은 포식자의 눈에 띄기 쉽고, 무리와 다른 외모와 기형 때문에 무리로부터 도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단순히 오락을 위해 돌연변이종을 억지로 교배하는 것을 막고 동물원이 동물의 복지를 우선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 이윤선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