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이 정형화된 느낌이지만, 뜻을 새겨보면 참 아픈 제목이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프지만, 남한 내에서도 극심한 대립으로 할퀴고 뜯는 모습을 지금도 너무 쉽게 보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는 시점은 지방선거를 앞둔 상태)

전작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보다 감상적인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좀 더 감정을 빼고 객관적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 느낌이 난다.  프랑스와 프랑스인을 얘기하면서 우리의 사회를 투영해보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는데, 부럽고 안타까운 기분이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것도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 혹은 타국 주도로 들어왔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자체적으로 정착한 서양보다 정치의식 혹은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정치인이 존경 받는 대한민국을 오매불망 꿈꾼다.)

또 트집 잡기 위한, 상대를 꺾어내기 위한 정책 우선의 모습이 많은 것도 기막히고, 언론이 정치와 유착하여서 주구 노릇을 하는 것은 화딱지 나고, 거기에 휘둘리는 대중의 모습은 눈물날 지경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에 많이 감탄했다.  대통령일지라도, 실업자일지라도, 그들의 의견을 내놓는 자리에서는 똑같은 자격의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언론이 먼저 걸러내고 시민들이 인정하는 모습이 눈부시기까지 했다. 

또 파업 이야기에서 너무 쓰라렸는데, 우리 사회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이 발생하면, 시민들의 반응은 "또?"이며, 불편하다라는 이유로 파업자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왜 파업을 했으며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가 무엇인지 언론은 말해주지 않는다.  수구 언론과 부자 신문들은 앞다투어 시민들이 얼마만큼 불편했고, 그로 인해 받은 경제적 손실이 얼마인가를 요란한 수치로 떠들어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민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지 못한 파업 세력은 결국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또 다시 불평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며 일자리로 돌아간다(끝까지 버틴 사람은 공권력을 맛보거나 실업자가 된다.ㅡ.ㅡ;;;)

내가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 우리 사회가 하나되어 똘똘 뭉친 기억은 월드컵 때 온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하나된 응원을 했던 그때 뿐이었다.  과거 80년대에 서울에 봄이 왔다고 외치던 시절, 힘 닿는 데까지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우리의 윗 세대분들이 계셨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서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는 사회적 착취와 부당함에 대항해 하나되어 싸우고 국민이 지지했던 기억이라고는 전무하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한계점이 보이는 듯하다.  아무리 개인화되었고 삭막한 정서적 환경 속에 놓여 있다지만, 공공선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는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등, 우리가 속해 있거나 혹은 관련되어 있는,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회적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나몰라라 한다면, 내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몰라라 하는 사회에 대해 뭐라고 항의할 것인가.  잠깐의 불편을 감수하여 더 많은 사람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 살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은 정녕 가질 수 없는가 말이다.

이 책에서 또 부끄러웠던 부분은, 우리나라 뉴스의 보도 능력 혹은 태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프랑스에 방문했을 때 뉴스에서 중요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아무 공적인 이유 없는 사적인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대통령이 어디를 가면, 반드시 그 정황을 보도해주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왔다.  늘 그런 뉴스를 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 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갑자기 눈이 커진 느낌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딱 그 기분

잠시 역사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시대에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에 대항하여 네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반대파가 사라진 다음엔 자체 분열하여 당파 싸움을 하였다.(우리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이다.)  그때 율곡 이이는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라 개혁해야 할 때"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동인들에 의해 서인 편들기로 몰려가면서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해 가던 무렵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꺾고 전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이었다. 내부 싸움에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귀기울이지도 눈여겨 보지도 못한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우리 사회도 그렇지 않을까. 좌파니 우파니, 중도니 하면서 서로 편가르기를 하면서 세력 다툼을 할 때, 중국은 고구려가 지네 역사라고 하고, 일본은 지치지도 않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봄만 되면 중국에서 황사가 불어오는데, 우리는 눈과 귀와 코로 다 받아낼 뿐, 무엇도 대처하지 못한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통일의 당위성을 아느냐고.  통일을 왜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안 되었으면 바란다고 답한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대학 가기 더 힘들어지잖아요."라고 대답한다.

단지, 그네들이 어린 탓에 철없는 대답을 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아는 까닭에 씁쓸했다.  지금도 이럴 진데, 더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아예 서로 다른 길을 가지 않을까.  왜 남과 북이 하나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떠올릴 수 없지 않을까.

딱 집어서 어느 하나를 고쳐야 한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도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동시에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고치고 다듬고 바꿔나가야 한다.

정치인은 정치판에서, 경제인은 경제를 이끌어가는 구조 속에서, 언론인은 살아있는 정직한 필력으로, 학생들은 자신들의 본분인 공부에서, 모두모두 제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사회의 부당한 모습에 적극적으로 개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했다.  내 주변에 우리 사회에, 당장은 나와 무관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책이야기를 하다가 많이 흥분했다..;;;; 그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과 탄식을 병행했다는 이야기이다.  정치 선진국 대열에 대한민국도 속히 들어가기를 바라며... 나 자신도 업그레이드 된 사회의식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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