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과학

제 2660 호/2016-05-30

추천하기
  • 파일저장
  • 프린트
  • 트위터
  • RSS
  • 페이스북
만리장성을 지탱한 것은 ‘찹쌀 밥심’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담장 수리’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넓은 들판을 나눠서 쓰고 있는 이웃끼리 어느 정도 높이와 두께의 담을 쌓아야 적절한지 타인의 입을 빌어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담을 유지해요 / 담 양쪽에 떨어진 돌들을 서로가 주워 올려야 하고요 / 뭐 그저 양쪽에 한 사람씩 서서 하는 / 좀 색다른 야외 놀이지요 /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되풀이 합니다 /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 

담장을 너무 낮게 쌓으면 혹시 누군가 넘어오진 않을까 불안해지고, 너무 높게 쌓으면 싸우자는 뜻으로 보인다. 영토를 마주한 국가끼리도 적절한 관계 유지가 필요하다. 국경에 높은 벽을 쌓고 군대를 배치하면 곧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고, 그렇다고 관리를 하지 않고 두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고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8세기에 이민족의 침입을 받은 주나라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세력이 약해지자 인근의 여러 제후들이 나라를 세우고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춘추시대라 하는데 그중 제(齊)나라는 높고 기다란 성벽을 쌓아 영토를 지켰다. 세력이 가장 컸던 진(晉)나라가 멸망하자 수많은 소국들이 또 생겨나 혼란이 커졌고 곳곳에서 제나라처럼 성벽을 쌓아 자기 땅을 지키려 했다. 

기원전 3세기에 혼란을 평정하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진(秦)나라의 첫 황제인 진시황이다. 중국 내 독립국들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세웠던 성벽은 무너뜨리고 북쪽 기마민족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 덕분에 이후의 한나라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새로운 성벽을 세웠다. 

사진. 만리장성(출처: Hao Wei/Flickr)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다들 ‘만리장성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성벽은 오늘날의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의 위치는 5세기 남북조시대에 처음 잡혔고 돌을 각 지게 깎아서 올린 현재의 성벽은 천 년 가량이나 더 지난 14세기에 명나라가 다시 쌓은 모습이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 멸망 후에도 지속적으로 침입해오자 아예 허물지 못할 담을 쌓아 소통을 막은 것이다. 

당시의 뜻이 얼마나 확고했으면 5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만리장성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일까. 만리장성의 실제 길이는 원래 6,352km였지만 중국 정부는 2009년 동쪽 구간을 늘려 8,851km로 발표했고, 2012년에는 한술 더 떠 동쪽과 서쪽을 비약적으로 늘린 2만1,196km라고 선언했다. 1리를 400m로 계산하면 만리장성이 아니라 ‘5만3천리장성’이라 불러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벽이 튼튼하게 남아 있는 구간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 다만 관광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일부 구간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 버티고 서 있다. 수백 년을 견뎌온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토목 전문가와 과학자들이 달려든 결과, ‘찹쌀’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대 문명에서 석조 건축물을 지을 때는 여러 개의 주사위를 쌓듯이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접착제를 발라서 단단하게 붙인다. 서양에서 주로 사용된 것은 석회석 모르타르다. 모르타르는 시멘트처럼 돌가루를 물에 개서 만드는데 고대 로마제국에서 발견된 석조 건축물 중에서 모르타르를 사용한 건물은 연대가 기원전 24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술은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됐지만 화산재를 섞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지는 못했다. 

대신에 고대 중국의 석공들은 특별한 접착제를 사용했다. 돌가루로 만든 기존의 무기물 성분에 유기물까지 섞어 무기-유기 혼합 모르타르를 만든 것이다. 이 기술은 오늘날의 만리장성 위치를 잡은 5세기 남북조시대부터 쓰였으며 중국 중부 허난성 지역에서 발견된 당시의 석굴묘에서도 무기-유기 모르타르가 발견됐다. 송나라 때의 백과사전인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제조방법이 기록돼 있다. 

기존의 석회석 모르타르에 추가된 유기물 성분은 다름 아닌 ‘찹쌀’이다. 산화칼슘이 들어 있는 석회석 가루에 물을 부어 생기는 흰색의 물질 즉 소석회(消石灰)라 불리는 탄산칼슘인데, 여기에 찹쌀죽을 끓여서 얻어낸 유기물 즉 녹말의 일종인 아밀로펙틴을 섞는다. 그리고 돌가루를 첨가하면 오늘날의 시멘트와 같은 석화-찹쌀풀 반죽이 만들어진다. 돌이나 벽돌 사이에 반죽을 발라서 공사를 하면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건축물이 완성된다. 

무기-유기 혼합 모르타르는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도 지속적으로 사용됐다. 효능이 너무나 강력해서 1604년 명나라 때 강도 7.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이 공법을 지은 건물이나 성벽, 묘소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중국 남부 후난성 지역에서는 1978년 공사 중 불도저로 미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구조물이 있어 추가 조사 중에 석회-찹쌀풀 반죽을 사용한 명나라 쉬푸(溆浦) 석굴묘로 밝혀졌다. 

무기물에 유기물을 섞어서 모르타르를 만들면 어떤 원리로 내구력이 높아지는 것일까. 2010년 중국 저쟝대학교, 톈수이대학교, 중국문화유산아카데미 공동연구진은 난징시를 둘러싼 성벽에서 모르타르 샘플을 채취해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소석회에 섞은 찹쌀풀의 성분 중 아밀로펙틴이 억제제로 작용해 탄산칼슘 결정체가 커지는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했고 덕분에 수많은 미세구조물을 만드는 것으로 확인됐다. 물리적으로 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하중을 견디는 힘이 일반 석조물보다 더 크다. 무기물과 유기물을 섞어서 모르타르를 만드는 것이 효능 면에서 훨씬 뛰어난 셈이다. 

고대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실제 사용해본 결과 뛰어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천 년 전 송나라 때 만들어진 쇼우창 다리(寿昌桥)는 단 하나의 커다란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석조물이다. 국가보호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오랜 세월에 지반이 약화되고 교각 하단부에 나무가 자라나면서 석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해 결국 지난 2006년 수리를 실시했다. 복원 과정에서 석회-찹쌀풀 반죽을 사용해 석재를 접착시켰더니 수리 이후 5년 동안 비바람에 노출됐지만 어떠한 균열과 변형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석회의 강알칼리성 덕분에 석재 사이에서 풀이 자라나던 모습도 사라졌다.

이 비밀을 알아낸 덕분에 오늘날 고대 석조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거나 다시 짓는 일이 수월해졌다. 만리장성도 찹쌀밥으로 죽을 끓여 접착제로 사용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멀쩡히 남아 있는 셈이다. 혹시나 균열이 생기거나 귀퉁이가 무너지면 석회-찹쌀풀 반죽으로 복원하면 된다. 우리말에 “밥심으로 산다”는 표현이 있다. 이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건축물도 밥심 덕분에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6-05-31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