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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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젊은 선생님이다. 1학기 때 학부모 상담 시간에 아버지가 한분 오셨는데, 언뜻 언뜻 듣기에도 이분이 자꾸 말이 짧아지는 거다. 눙치고 들어가는 말투를 쓰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자식 담임 선생님께 그러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신경이 쓰였다. 이분은 2학기 상담 때도 또 오셨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말이 자꾸 짧아지곤 했다. 상대가 거의 자식 뻘에 가까울 만큼 젊디 젊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상대가 '여자'라는 게 이분의 말이 짧아지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마주보고 앉은 상대가 젊디 젊은 '남자' 선생이었다면 그렇게 수시로 말을 잘라먹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런 사례는 정말 비일비재하다. 아마 남자로 살고 있다면 잘 못 알아차렸을 수 있겠지만, 그런 취급을 늘 당하곤 하는 여자로 살다 보니 자주 목격하고 또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이 정도야 뭐... '귀여운' 수준이다. 이 책에서 통계로 말해주는 그 숱한 강력범죄와 비교한다면 말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이 전 세계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생각하면 참으로 무섭다가도, 그럼에도 자국 국민들에게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제 식구들은 감싸는구나... 싶다가도, 그런 미국조차도 여자와 남자는 이렇게 다른 대접을 받는구나 싶어서 적이 놀랐다.


중동 국가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강간자의 주장을 반박할 다른 남성 증인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자신이 당한 강간을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증인은 드물다. -17쪽


그러니까 이런 중동 국가와 비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9쪽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 번째다.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그런 부상자 200만명 가운데 50만명 이상은 의료 처치를 받아야 하고 145,000명 가량은 입원해야 한다. 사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미국 임신부의 사망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또한 배우자 폭행이다. -49쪽 


이런 숫자는 경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조차도!!


물론, 반대 사례도 있다. 전 IMF 총재 스트로스 깐 사건의 사례 말이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이렇게 압도적인 권력과 명성을 가진 남성을 상대로 훨씬 가난하고 힘없는 여자가 고발을 한다면.... 언론에 나오기나 할까 모르겠다. 


아무튼,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거나 혹은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그런 시각은 인류 역사 내내 있어 왔고, 21세기에도 사실 만연해 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해 오고 목숨 바쳐 싸워온 덕분에 겨우 이정도 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렇게 피흘려서 온 게 여기까지라는 것.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자들은 볼멘 소리로 난 그렇지 않은데... 라며 불쾌해 한다. 싸잡아 욕먹는 불쾌감을 당연히 이해한다. 일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한번씩 생각해 줬으면 싶다. 어디서나 언제나 위험과 공포에 노출되는 불안함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인지. 가수 김범수가 어릴 적에 골목길을 걸을 때 앞에 여자가 있으면 일부러 발소리를 더 크게 내는 장난을 쳤다 라디오에서 얘기한 기사를 보았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앞에 가던 여자가 도망치듯 뛰어갔다고. 철없던 어린 시절의 장난임이 분명하겠지만, 그걸 방송에서 이야기할 정도면 아직도 골목길에서 불안감에 심장 펄떡이며 뛰어야 했던 여자의 공포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무심함이 돌멩이 하나로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지만 여자들이 늘 노출되어 있는 세상의 돌멩이를 말이다. 


시사인 434호에 신윤영 씨가 쓴 글이 인상 깊었다. 늦은 밤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갑자기 자기의 어깨를 덥석 잡았던 것이다. 여자는 공포에 질려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으로 보았고, 남자는 "동네에서 몇 번 봤는데 혹시 시간 있으시면..."


하아, 센스 없는 건 둘째 치고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일갈하고 싶다. 필자는 이렇게 썼다.


너무 화가 나서 무서운 것도 잠시 잊었다. 으슥한 밤길에서 이따위 묻고 거친 방법으로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다니, 당신은 당신과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어떤 공포와 불안감을 참으며 사는지 전혀 모르지? 그런 건 관심도 없지?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몸에 다짜고짜 손부터 대냐고! 


하지만 필자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나름의 임기응변으로 그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여자들은 철이 들기 전부터 '낯선 남자'에 대한 공포를 집요하게 교육받는다. 밤늦게 다니면 위험하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성범죄의 표적이 된다, 남자는 성욕을 제어할 수 없다 등등. 뼛속까지 스민 교육의 결과로 뒤에서 걸어오는 낯서 남자를 불안하게 돌아본다든가 계단에서 가방으로 스커트를 가리기라도 하면 '왜 가만히 있는 남자들을 치한 취급을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듣는다. 몸을 드러낸 옷을 입으면 '헤픈 여자' 취급을 받고 몸을 꽁꽁 싸매면 '수녀원에서 나왔느냐'며 비웃음을 받는다. (...) 사실 성범죄의 원인은 여자의 옷차림도, 여자의 '평소 행실'도 아니다. 원인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단 하나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입하며 마치 통제 안 되는 짐승("남자는 다 늑대야")인 양 남자 전체를 매도하는 것보다는 남자아이들에게 '허락 없이 남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상대가 싫다고 하면 정말 싫은 거다'라고 가르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분명 대부분의 남자는 선량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99%가 좋은 사람이라 한들, 그렇지 않은 나머지 1%의 파괴력이 너무 크다. 결국 그 1% 때문에 나머지 99%까지 경계하게 된다. 혹시 늦은 밤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종종걸음으로 당신 앞을 걸어가는 여자를 보게 되더라도 너무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녀가 당신을 겁내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인상이 나쁘다거나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남자여서 그런 거니까. 그날 밤 이후 나는 해가 지면 무조건 택시를 탄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온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감금은 호시탐탐 여성을 감싸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111쪽


겨우 한 남자의, 그러니까 1%의 나쁜 새끼 때문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겪으며 감수해 오며 살아왔던 그 숱한 시간들을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충격이나 억울하다는 표정 대신에!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88쪽


이 부분을 보면서 또 다시 소환된 기억이 있다. 1989년이다. 이모가 강도를 만나 돌아가셨고, 형사들은 이모부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새벽에 화를 당했는데, 비명을 지르는 여자 목소리가 이웃들이 듣기에 '부부싸움'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이모의 시신은 연쇄살인범의 짓답게 참혹했다. 그 지경이었는데도 누군가는 그걸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책은 읽는 내내 무한공감에 빠져들기 때문에 무한좌절에 빠지기도 쉽다. 그렇지만 한숨부터 쉴 필요는 없다. 꽤 슬픈 이야기지만, 이 기막힌 이야기를 저자 리베카 솔닛은 제법 유쾌하게 풀어나가고 있으니까. 원래 투쟁에는 유머가 필요한 법. 심각하기만 하면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을 버텨낼 수 없다. 


여기 그 길이 있다. 천 마일은 될지도 모르는 기나긴 길이다. 이 길을 가는 여성은 채 1마일도 걷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진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 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2014] -227쪽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기 불편했다.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이 단어에 씌어진 이미지가 말하는 사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역자가 지적했듯이 그러나 젠더를 빼고서 젠더를 말할 수는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reclaim)는 뜻이다. 용어가 문제적 현상을 호명함으로써 변화를 돕는 도구라고 할 때,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가 그렇다. 젠더의 문제를 다룰 때 젠더를 빼고 말할 순 없다.  -232쪽


이 책을 읽으면서, 저 키링을 달면서 한 번 더 곱씹고 한 번 더 되새기며 페미니즘을 상기했다.  

설치고, 떠들고, 말할 것이다. 더 크게, 더 힘차게!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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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6-01-1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면서 읽다가 이모님의 사연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네요. 게다가 부부싸움으로 오해받은 이모부의 일이나... 정말 부부나 연인관계는 그럴 수 있다고 치부하는 거 넘 화나요. 그것 때문에 죽는 사람이 얼만데...
남초 회사에서는 재가 담당잔데 사장없어요? 라고 묻는 인간들이나 여자만 있는 여초 회사에 가도 담당자보다 외부 남자들 얘기를 더 신뢰하는 사장한테서 유리천장을 경험하고 멘붕에 빠질 지경입닏다

마노아 2016-01-16 17:23   좋아요 0 | URL
고문이 여전히 실행되던 시절인지라 당시에 이모부가 열흘 간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했는데, 더 있다가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짓이라고 거짓 자백을 할 지경이었대요. 다행히 열흘 째에 진범이 잡혔지만요. 참 소설 속에서나 낭놀 법하 일이죠.ㅜ.ㅜ
남초 회사건 여초 회사건 어디나 여자들의 위치가 참 갑갑하지요. 이놈의 유리천장! 그래도 꾹꾹 버텨냅시다. 꼭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