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이화학당의 당장실로 열 살짜리 여자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들어섰다. 그곳엔 아이가 생전 처음 보는 파란색 눈의 서양인 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아이를 반갑게 맞으며 난로 가까이 다가오라고 잡아당겼다.
그 순간 아이는 두려움을 느꼈다. 부인이 자신을 난로 속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부인의 친절한 미소를 보며 아이는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서양인 부인은 바로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었으며, 여자 아이는 이화학당 부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점동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개설된 시기는 1885년 8월이다. 그러나 첫 학생이 들어온 것은 그 이듬해인 1886년 5월이었다. 여성의 신교육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양반집 자녀들이 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이화학당에는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입학했으며 김점동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한 김점동은 특히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래서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김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일하고 있던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통역을 맡게 됐다. 보구여관(保救女館, 여성을 보호하고 구한다)은 병에 걸려도 아픈 부위를 의사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하던 여성들을 위해 이화학당 구내에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었다.
그곳에서 김점동이 로제타 셔우드 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의사의 모습은 늘 칼을 들고 수술하는 것이었다. 당시 의사라는 직업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은 이유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구순구개열 환자, 속칭 언청이라 불리던 10대 소녀가 로제타의 수술을 받고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후 김점동은 자신도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김점동은 남편 박유산과 함께 1895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의사의 꿈을 심어줬던 로제타 셔우드 홀의 친정이 바로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움으로 미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그해 9월부터 김점동은 병원에 취직해 생활비를 벌면서 라틴어와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 김점동은 각고의 노력 끝에 4년 만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됐다. 당시만 해도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된 이는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 자격증을 딴 서재필과 일본에서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 뿐이었다. 김점동은 그들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의사가 된 것이다.
김점동이 미국에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박유산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큰 역할을 했다. 생활비와 아내의 학비를 대기 위해 박유산은 농장에서의 막노동과 험한 식당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아내의 졸업을 2개월 앞두고는 폐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국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른 김점동은 1900년 10월 귀국했다. 그해 12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 창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부인 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신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중략)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그는 소녀 시절 의료보조로 일했던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먼저 한국에 들어와 있던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가 죽은 남편을 기념해 평양에 기홀병원(起忽病院)을 세우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평양에 부임한 지 10개월 만에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또한 평양의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도 진료했으며, 황해도와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가 만든 기홀병원 부속 맹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김점동은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갈 만큼 열성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 여성 의사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으나, 그의 인술(仁術)은 서서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김점동이 수술로 환자를 간단히 낫게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라는 말이 나돌 만큼 명의로 알려졌다. 진료 활동 외에도 그는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
인공관을 이용해 방광질 누관 폐쇄수술을 집도하는 등 의미 있는 의료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의료 활동을 벌이던 김점동은 자신의 몸에 질병이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질병은 바로 남편을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죽게 한 폐결핵이었다.
김점동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뒤늦게 베이징으로 요양을 떠나기도 했으나,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둘째 언니 집에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아무런 소생을 남기지 않은 35세의 짧은 생이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926년 7월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의 아들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이 한국으로 건너와 해주구세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는 1928년 결핵환자를 퇴치한다는 명분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으며, 1932년에는 해주구세요양원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늘 어머니와 함께 일을 했던 김점동을 이모처럼 따랐다.
그가 이처럼 우리나라의 결핵환자들을 위해 노력한 이유 중 하나는 김점동의 죽음 이후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은 김점동 덕분에 발행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