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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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새기는 것이라고 대학 때 한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어리다고 꼭 순수하고 깨끗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일반론으로 볼 때 대체로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더 때묻고, 감추고 싶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 나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속내를 감추거나 덮고, 또 아닌 척 위장을 하는 데에도 익숙하게 된다. 과연 성공했느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여기 이곳에 그런 어른들이 가득 담겨 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한껏 열연을 펼쳤지만, 이제는 무대에서 쫓겨나거나 떨어지거나, 혹은 무대가 홀랑 타버린... 그렇게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이 가득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지만, 그 와중에 쓰디쓴 유머 한자락도 뱉어낼 수 있는 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지질하고 갑갑하지만 연민 한줌 쥘 수밖에 없는 나와, 우리와 몹시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


핑크 편이 유난히 마음이 쓰였다. 대리기사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이 외제차를 몰고 있는 동창이라는 것. 크게 공감했다. 나도 그렇게 내 직업군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꼭 걸맞지는 않지만, 어제 꼭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대를 만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식의 만남이 꽤 있을 것 같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나이만 먹는 기분이다.


이럴 때 쓴 소주 한 병 정도 마셔줘야 뭔가 그림이 될 것 같았지만, 그저 진한 커피 한잔으로 대신했다. 수다를 조금 떨고 싶었지만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말로 풀어낸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지만, 그냥 그 순간에는 혼자 있는 게 서러웠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책 속 남자가, 여자가, 그들의 못난 행동들이, 지질한 변명들이 모두 나같고 나였고, 나일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마치 그 각각의 인물들을 모두 경험해본 것처럼, 마치 살아본 것처럼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서술해 가는 천명관의 거침없는 문장들. 페리 박의 사투리가 어색하지 않아서 의외였는데 원래 여수 출신이었다는 지성처럼, 천명관이 창조해내는 캐릭터들은 제각각 걸맞는 옷을 입고 마땅한 연기를 해내고 있다. 천생 이야기꾼이다.


개인적으로는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도 그의 장편이 더 나에게는 맞을 것 같지만, 이 짧은 이야기들로도 천명관을 맛보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이야기가 가득 필요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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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02-2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대화가 필요한 날이었군요.ㅠ
천명관 명성은 들었는데도 작품은 못읽었어요.

마노아 2015-03-01 21:08   좋아요 0 | URL
고래에 대한 명성이 자자한데 그 작품은 아직 못 보았어요.
한권만 읽었는데도 입담이 대단한 걸 바로 알겠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