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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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성석제는 만담꾼이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의 재기발랄함에 반해버렸다. 진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게 아닌데도 그의 넘치는 유머가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진지함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작품 때문에.


일제강점기 부잣집 삼대독자로 태어난 지식인 할아버지는 사상 문제로 고문을 받았고, 그런 할아버지를 구제하느라 그 대단한 집안 살림이 거덜났다. 그리고 야반도주를 해야 했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반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공부는 멀리하고 땀흘려 노동한 대가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로. 그러나 도망친 그곳은 농사 짓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살림은 궁핍했고 가족들은 고단했다. 그렇게 3남3녀가 태어났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중 넷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인 만수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만 크고 팔다리는 비실거렸던, 워낙에 수재였던 큰형에 비해 모든 게 느리고 더뎠던 아이 만수는 약아빠진 셋째 아들 석수하고도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그러나 뭐든 느리고 굼떴던 이 만수가 결국엔 집안의 대들보가 된다. 고엽제로 월남에서 큰형을 잃고,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왔다. 가족 부양을 못한 할아버지를 대놓고 경멸했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도 모자라 폭력을 일삼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자식들이 결혼하지 않고 자신을 부양하기를 바랐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그 아버지를 똑닮은 석수도 마찬가지로 하게 된다.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상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으리라. 천분을 넘어서는 것을 욕심내지 마라. 욕심이 과하면 탐심이 생긴다. 탐심은 남의 것을 훔치게 만든다. 도둑질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된다. 필요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내가 가진 것과 바꾸어라.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빌려라. 먼저 말을 하고 구하면 얻으리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훔치는 건 안된다. 훔치지 마라. 훔치고 나면 너는 네 것을 모두 도둑맞게 된다. 네 삶을 도둑 맞는다.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남겠느냐.-28쪽


염치를 강조했던 할아버지의 말씀은 만수의 머리와 가슴 속에만 새겨졌나 보다. 삶의 고비고비, 굽이굽이에서 만수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모두들 그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알고 있고 고마워했지만, 누군가는 알았어도 고마워하지는 않았다. 누이와 남동생의 차이였다. 그러나 염치를 아는 듯 했던 막내 누이도 결국엔 변해버렸다.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든 데는 만수 오빠의 책임도 있다. 처음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어른이라면 그런 나쁜 놈을 알아보고 쫓아버렸어야 했다. -333쪽


학생운동하다가 만난 남편은, 소위 진보입네 했던 그 남편은, 한마디로 쓰레기였다. 그런 쓰레기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한때 자본주의와 국가의 이빨과 독재의 칼날 앞에 놓인 민중을 구하겠다는 뜻을 같이한 적이 있는 동지였다. 민중과 하나가 되어 평생을 살겠다는 각오를 나눈 사이였다. 그런 중에도 동지가 몸살로 정신없이 앓는 틈을 타서,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성폭력을 가하고 나서 ‘내가 도장을 찍었다’고 하던 인간이었다. -318쪽


작품은 만수라는 한 인물이 겪어온 인생의 여정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 세대에 이르고 자본주의 끝장을 보고 있는 오늘에 닿기까지, 즉 대한민국 현대사를 한 인물에 투영해서 보여주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 순박함과 순수함에, 그 애달은 가족애에 뭉클하기도 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비극들에 가슴을 끓게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노조가 정당한 노동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업장의 피해는 변상할 의무가 없다고 법에도 나와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권을 행사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 공장에서 먹고 자고 싸운 모든 게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불법은 법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법은 어차피 가진 놈들, 힘 있는 놈들,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판검사, 정부, 정치가, 경찰, 강자의 편이었다. -298쪽


단 한번도 가족을 귀찮아 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았던 한 사나이. 빚조차도 살아갈 동력이라 여기며 살아있는 것을 늘 감사했던 한 사나이. 그러나 그의 희생과 헌신을 누군가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리던 그가 마침내 투명인간이 되었다. 소설은 투명인간이 된 만수를 알아본 또 다른 투명인간의 반응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투명인간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오는 데에는 150여 쪽을 할애해야 했다.  

-맞다. 인간은 염력으로 피라미드도 세우고 신대륙도 발견했다. 투명인간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다. -152쪽


염력으로 피라미드를 세우고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선상에서 취급된 투명인간은 '대단한' 누군가로 보인다. 그러나 만수 씨의 고단한 인생을 들여다 보고 마지막에 맞닥뜨린 투명인간은 세상이라는 파도에 깎이고 깎여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힘들었던 한 사나이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최후의 수단으로 보였다. 오죽하면, 오죽했으면......


'국제시장'은 천만 이상의 관객이 본,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천만 씩이나 볼법한 영화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천만이나 보고 싶어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영화였다. 고단했던 그 시절을 살아냈던, 땀흘려 일하고 가족을 지키고 그걸로 애국을 해냈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게 보내는 일종의 찬사와도 같은 영화였다. 그 영화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그 시대를 묘사하고, 그 시대의 빛과 어둠을 모두 보여주는 소시민 중의 소시민 만수 씨가 이 책에 있다. 이런 만수 씨를 보며 답답해 하고, 고마워하고, 그러면서 또 이용하고 원망까지도 하는, 우리들이 갖고 사는 온갖 감정의 찌꺼기도 모두 이 속에 있다. 우리의 현대사가, 우리네 인생들이 모두 녹아 있다. 좋은 작품이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련해지는, 먹먹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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