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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허지웅에 대해서 아는 바는 사실 거의 없지만, 방송에 종종 얼굴을 비추니 얼굴은 알았고, 영화평론가 허남웅의 이름을 보고서 허씨 집안에 '웅'자 돌림이 있나 보다... 뭐 이 정도 생각했다. 이 책이 한참 회자되며 많은 분들이 이야기할 때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미안하다. 고백하자면 '허세 쩌는' 허지웅이라고 생각했다. 인상이 그랬다. 역시 미안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허세 쩌는 허지웅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도 내가 막연히 짐작했던 것 같은 잠시 반짝 인기를 얻은, 시류에 편승한 얼치기는 아니었다. 허세는 있을지언정, 진정성이 보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그의 신랄한 혓바닥에 대해 그는 스스로를 설명하고 방어하고 부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에세이집이다 보니 개인 소사에 대해서도 나온다. 유년 시절, 부모님, 고시원 시절 등등등... 인간 허지웅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지만 이 부분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음. 하하핫, 솔직해서 미안하다. 진심이다.
다만 사회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한 마디씩 씹을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아, 이거 뼈있네. 그래그래. 동의해... 라고.
너는 좌파니까 안 된다는 말에 대응하기 위한,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방어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방어는 애초의 구질구질한 주장을 무력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사상검증의 악순환을 부채질한다. 실제 당신이 좌파든 우파든 공산당원이든 사민주의자든 파시스트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차피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와 여당이 부채질하고 있는 저 정체불명의 진영논리에 따르면, 내 편이 아니면 전부 좌파다. 이 허울뿐인 수사 앞에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고백은 스스로를 증명하고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한 어떤 효과도 가져올 수 없다.
도대체 내가 좌파여선 왜 안 되나. 좌파라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인가. 너는 좌파라서 안 된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잡음과 논란은 많을수록 좋다. 가져선 안 될 신념을 상정하고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말의 힘이고 마법이다. -175쪽
근래 박원순 시장의 행보가 찝찝했다. 인권헌장 채택 건 말이다. 그가 대선을 내다본다면 나야 환영하는 바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클릭을 시도 혹은 시행한다는 건 전략적으로 우려스러웠다. 소위 진보 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 우클릭했다가 성공한 사례가 있던가?
그렇지만 저런 식의 처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충분히 수긍간다. 연말 즈음에 받은 교원평가에서 학생들이 내게 보여준 지지는 황송할 정도였다. 단순 지표로 점수를 매기면 내가 학교 탑일 것 같았다. 그런데 몇몇 학생이 나더러 좌편향 교사라고 써놨다. 말 그대로 '심쿵' 했다. 아, 재계약은 힘들겠구나. 시절이 하수상한데 재수 없으면 아주 이상하게 꼬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보내준 찬사와 상관 없이, 그 몇명의 학생들이 어쩌면 뜻도 모르고 썼을 것 같은 그 '좌편향' 딱지가 주말 내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랬다. 나처럼 아주 평범하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한 조각조차도 움찔하게 만드는 이 좌파 딱지. 대한민국이 얼마나 병든 사회인지 가늠하게 만드는 한 사례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대목은 이 불행한 여인에게 연민을 가지라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대목에서 방점은 ‘먼저’에 찍히는 것이다.
백 개의 돌팔매 안에 돌멩이 하나로 숨어 있을 때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1/N이라는 익명의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이 타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알고도 책임질 수 있으면 돌을 던지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 -187쪽
1/N이라는 익명의 폭력이 참으로 무섭고 비겁하다. 많은 왕따 사건들이 바로 저 1/N을 빌미 삼아 책임 없는 척하며 가해자의 얼굴을 숨기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지 않던가.
언론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왔다. 백번 동의하고 또 동의한다. '기레기'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언론들은 오보의 가능성 따위 얼마든지 감수하면서 기사를 내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사실을 욕망하지 않았다. 정작 그들이 욕망했던 건 진실이 아니라 이슈였다. 정확한 사실 전달보다 좀 더 빠르고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를 원했다. 뉴스 소비 행태가 인터넷 포털 중심으로 재편성되면서 황색 저널리즘이 유난히 강화됐다. -199쪽
물론 기레기들이 아무 연관고리 없이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욕망하지 않는 대중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더 큰 책임이 언론에게 있을 뿐.
1997년에 발표된 이승환 5집 앨범에 '애원'이라는 곡이 있었다. 타이틀은 아니었지만 타이틀스러운 대곡 발라드였다. 그런데 이 애절한 곡의 뮤직비디오에 귀신이 찍혔다. 광나루역에서 촬영한 지하철 씬에서 기관사 옆에 흰 소복 입은 떡대 좋은 긴머리 여자가 잡힌 것이다. 대중에게 공개된 뮤직비디오에는 당연히 이 장면을 삭제했지만, 이것은 곧 이슈화되고 이승환이 앨범을 띄우기 위해서 노이트 마케팅을 벌인 거라고 소문이 났다. 이승환은 분노했고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기자들은 반박기사를 써주지 않았다. 뒤에 그가 억울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이들도 기사는 써주지 않았다. 이유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자극적인 기사는 사람들의 관심에 불을 피울 수 있으니 얼마든지 언론을 이용해서 퍼뜨리고,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이미 흥미가 사라지고 난 뒤이니 정정보도는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과도 없다. 아니었어? 아님 말고!
이런 사태에 염증을 느낀 이승환은 은퇴를 결심하고 6집 앨범에서 '당부'라는 꼭을 쓴다. 머지 않아 그대와 헤어지게 될 거요~로 시작하는 곡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는 은퇴하지 않았고(다행히!) 여전히 현역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고 있다. 대신 이때의 심정을 담아 '귀신소동'이라는 곡과 'rumor', '퀴즈쇼', '소통의 오류' 등의 노래에서 언론과 대중의 미친 줄타기를 꼬집는 곡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누구나 이렇게 털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억울함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많고, 폐인이 되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그런 사례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자주 보아왔던가.
요즘 한국 영화에 가장 많은 점유율을 보이는 배우는 아마도 '이경영' 씨가 아닐까 싶다. 한때 방송에서 젠틀한 이미지로 잘 나가던 그가 스캔들로 곤두박질 쳤다. 그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파렴치한으로 남아 있다. 그는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영화에서 아주 작은 역이라도 맡겨주면 열심히 배역을 소화했다. 불러주는 것이 고마워서 부르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그랬던 것들이 이제는 극장 가면 그를 무조건 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연출하게 됐다. 여기에 관해서는 영화 '더 헌트'를 적극 추천한다. 한번 실추된 명예가 결코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정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연예인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스타를 공인이라 부르며 사생활을 헤집는 대담함과, 그것을 감수하며 눈물을 떨구거나 거짓말을 하는 스타의 처연함 사이에는 일종의 부채의식과 상환에의 의지가 양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에 대한 사이버 테러를 일종의 권리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현상도 이렇게 보면 이해할 만한 사고의 흐름이다. 사채꾼도 돈 받으러 갈 때는 정의롭다. -237쪽
스타는 공인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인이라 부르고, 또 스타들도 자신이 공인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만, 용어의 쓰임 자체는 둘째 치고 바로 그 스타를 향해 사생활 침해는 물론 테러에 가까운 비뚤어진 관심을 보이는 인간들은 또 왜 그리 많은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타진요다. 이제 제발 미친 관심과 의심을 거두고 진짜 '공인'에게 정의의 칼을 휘둘렀으면 좋겠다. 허지웅의 표현대로 배트맨이 조커가 아니라 연예인 신상정보나 캐고 있다면 그게 다크 나이트가 되겠는가.
요즘엔 엽기적인 범죄가 자꾸 증가하고 있다. 마치 경쟁하듯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경연대회를 여는 것 같다. 끔찍한 사건이 터지고 나면 사람들은 모두 왜 저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당연히 궁금해 한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명료한 이름을 붙여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떠벌리기 좋아하는 종자다. 언론이 해법을 제시한다. 애니메이션 때문이다. 웹툰 때문이다. 왕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공포가 아닌, 가십으로 전락한다. 이제는 쉽고 재미있는 점심시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도매’ 마케팅은 당장 눈앞의 편한 대상을 원흉으로 몰아 문제를 단순화하고, 실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고민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악랄한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우리는 애초 그 고민을 하고 싶었던 걸까. 기회가 있다면 폭력의 맥락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언론의 관련 보도 자체를 불의라 규정하는 건 짜증의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정확한 지적은 될 수 없다. 공포를 도매가로 판매하는 언론의 무책임은, 쉽고 편한 오락거리를 도매가로 요구하는 우리의 여가와 공생하고 있다.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끊어야 할까. -227쪽
청소년보호법의 번제물이 됐던 이현세 씨의 '천국의 신화'가 먼저 떠올랐다. 그 소모적이었던 긴 논쟁.
최근에 끝난 드라마 중에 '피노키오'가 있다. 언론이 사람을 영웅으로도 만들 수 있고, 한순간 죽일놈으로도 만들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는 걸, 그리고 그 힘을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남용하고 있는 것을 고발하는, 제법 재밌는 청춘 멜로물이었다. 극중에서 보도국 국장이 말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뉴스와 봐야 하는 뉴스 중 어느 것에 방점을 찍을 거냐고.
시청률을 위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는 걸 먼저 보도하겠다는 국장에게 주인공 기하명(이종석)은 이렇게 반격을 가한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는데 뭘 먼저 듣겠냐고. 그의 선배는 좋은 소식을 먼저 듣겠다고 했고, 하명은 곧 한류 스타가 총출동하는 대형 공연에 선배 기자가 차출됐다고 알린다. 선배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나쁜 소식이 뭐냐고 묻는다. 하명은 얼마 전에 검사받은 건강검진에서 췌장암 진단이 나왔다고 담담하게 알렸다. 선배는 당연히 좌절하고 그걸 왜 지금 얘기하냐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하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듣기 좋은 소식을 먼저 알리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사람들이 지금 알아야 하고 지금 들어야 하는 기사들이 많이 있는데, 그걸 다 뒤로 미루고 가쉽에 가까운, 흥미 위주의 기사들만 먼저 챙기는 것은 췌장암 발발 소식을 뒤로 하고 한류 스타 기사나 챙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현실이 그렇게 따라주질 않아서 문제지. 그런데 언론이 그렇게 나오는 것은 시청자들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허지웅이 말하지 않았는가. 누가 먼저 그 고리를 끊을 것이냐고. 엄마 방에 들어갈 때마다 자주 채널을 돌려놓는다. 지금은 뉴스 시청 하시라고. 기왕이면 좋은 뉴스 보시라고... 아주 작은 몸짓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나.
영화 '필라델피아'와 '콘스탄트 가드너'는 덕분에 보고 싶어진 영화다. 그리고 '설국열차'는 덕분에 더 좋아진 영화다. 영화와 함께 설명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현실의 초라함들을 그는 아주 냉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냉소는 때로 막연하고 뜨거운 주관보다도 되레 진실을 더욱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허지웅은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혓바닥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듯 보인다.
역시 시니컬함이 잘 어울리는 그의 표현에 빗대어 마무리를 해보자.
아무튼 산다는 건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떼어내어 다시 붙이려다가는 못 쓰게 된다. 먼지가 들어갔으면 들어간 대로, 기포가 남았으면 남은 대로 결과물을 인내하고 상기할 수밖에 없다. -37쪽
얼마나 걸맞는 비유인가. 산다는 건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일과 비슷하다. 다시 사다 붙일 수 있는 액정 필름이 아니니, 먼지가 들어갔으면 들어간 대로, 기포가 있으면 또 그대로 인내하고 견뎌야 한다. 고작 그것 때문에 핸드폰을(삶을) 갖다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 삶이다. 우리의 삶이다. 잘 버티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