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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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참 잘 지었다. 수록된 소설들의 제목 하나를 표제작으로 삼았는데 전체 이야기들이 모두 '신중한 사람'으로 수렴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단점이 있다면, 신중하다 못해 복장 터질 수 있다는 점. 표제작인 신중한 사람의 자평을 들어보자.


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46쪽 

맞는 말 같다. 신중한 사람들의 저 설명은 누구에게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들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인공의 신중함이란 과연 마땅한가? 자신이 지어놓은 전원 주택을 해외 근무하는 3년 동안 이웃에게 관리비를 주고 관리를 맡겼는데, 그 이웃이 전세를 놓고는 잠적했다. 전세는 얼마 전에 자동갱신되었고, 집주인은 제 집에 들어와 마음대로 집의 경관을 바꿔놓으며 살고 있는 세입자에게 하루 만원씩, 그것도 한달치 선입금을 한 뒤 다락방에 세들어 살고 있다. 


집주인 혹은 자본가의 횡포 내지 유세에만 익숙해 있어서인지, 자기 집에서 이렇게 빌붙어(?) 겨우 살아가는 '신중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 속에 천불이 일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흥분하는 건 곤란하다. 이렇게 혈압 오르게 만드는 인물들이, 혹은 상황들이 아주 많이 나온다. 많.이.


그래서 이상의 '권태'가 떠올랐다. 정말, 읽는 내내 어찌나 지루하던지, 이보다 더 잘 지은 제목은 없을 것이라고, 제목이 책 내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고등학교 때 생각했다. 아마도 단편이었던 것 같은데, 짧은 글인데도 그랬다. 이제 그 지위를 이 책에게 넘겨줘야 하지 않을까. 


작품 속의 인물들은, 혹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작가는 설명에 설명을 계속 보태고 있다. 의도적인 늘여쓰기, 의도적인 중복 설명들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말에 갇힐 것 같은 어지러움!


그는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인가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고 특이한 일도 아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을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113쪽 <이미, 어디>

결국엔 첫문장 하나를 계속 반복하는 이야기이다. 경제적으로는 말의 낭비가 심하지만, 그걸 문학으로 받아들이면 또 다르게 다가온다. 어찌 됐든 저 길고 긴 문장들을 다 읽고 나면 강조했던 첫 문장의 의미가 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의 손톱은 자랄 수가 없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물어뜯을 손톱이 있는 한 언제나 물어뜯기 때문이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손톱을 물어뜯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손톱을 물어뜯는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물어뜯을 손톱이 남아 있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손톱을 물어뜯는데, 물어뜯을 손톱이 없으면 더 불안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물어뜯을 손톱을 찾는다. 그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물어뜯을 손톱이 없어져야 하고 또 있어야 한다. 그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손톱을 물어뜯고 손톱을 물어뜯어 손톱을 제거함으로써 다시 불안을 만들어낸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어뜯을 손톱이 없으면 없어서 불안하고 있으면 있어서 불안하다.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은 불안하기 때문에 손톱을 물어뜯지만, 그가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그가 손톱을 물어뜯기 때문에 불안해진다.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은 손톱을 물어뜯음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만들고,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불안도 만든다. -120쪽 <이미, 어디>


어떤가? 손톱을 물어뜨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한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한지,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마저도 불안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맛볼 수 있지 않은가. 하아, 책에 무슨 영기가 서려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에게 가장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어디에도 없는>이었다. 그가 걸어온 답답한 인생 행보에 대한 성토는 둘째 치고, 그를 덮어놓고 의심하는 여관주인을 납득시키지도, 이해시키지도 못했던 그의 막연한 기다림, 그리고 이어지는 불운들이 안 그래도 요새 심장 안 좋은 나의 가슴을 더 조이고 말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곳에 가야 했다. 그곳에 가는 것이 이곳을 떠나는 방법이었다. 그는 그곳에 가기 위해 이곳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떠나기 위해 그곳에 가려고 했다. 이곳을 떠나는 일 없이 그곳에 갈 수도 없지만, 그곳에 가는 일 없이 이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241쪽 <어디에도 없는>

얼마나 간절하게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는지가 역시나 절절하게 다가온다. 계속되는 이런 반복된 문장들은 독자를 지치게도 하지만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를 가장 열받게 한 것은 이 작품들이 아니었다. <하지 않은 일>이란 단편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오해를 받고, 해명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대체 어떤 하지 않은 일이 했다고 포장되었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받은 그 억울한 감정이 폭풍이해가 되는 것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열이 받은 채 잠이 들었는데, 당시와 관련된 꿈을 꾸고 말았다. 그야말로 악몽. 다시 떠올려도 열받네. 


졸지에 재산과 자식을 잃고 온몸에 종기가 생겨 재 속에서 뒹구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이 왜 욥을 만족시키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욥은 친구들의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못했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상황에 맞지 않는 신학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이라니. 기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병문안 온 자리에서 병문안 온 사람과 병문안받는 사람 사이에 그렇게 심각하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는 건 위로가 불가능한 고통이 있다는 걸 시사한다고, 혹은 하는 자에게나 받는 자에게나 어차피 불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위로의 본질이라는 걸 시사한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욥은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위로의 과제를 수행하러 왔을 뿐이라는 걸, 처음에는 몰랐을지라도, 결국 알게 되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위로의 모양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속으로는 자기의 우연한 불행을 은근히 고소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의 우연한 불행에 필연을 첨가하기 위해 인과응보와 신의 징벌이라는 관념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들이 자기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고통을 보고 즐기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 친구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은 욥에게 당신을 투사했다. 욥이 되어 그 친구들을 고발했다. -297쪽 <하지 않은 일>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 욥의 친구들은 욥이 아주 잘 나갈 때, 그의 복을 함께 기뻐하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게 아닐까. 그랬기에 욥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런 그를 향해 사실은 네가 잘못 살아왔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을 받은 거야!라고 지적질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중학교 때 교회 전도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새로 오픈한 가게에 가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문구 액자가 많이 걸려 있는데, 이 문장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비웃으면서 했던 말이기 때문에 오픈 선물로 적당하지 않다고. 그게 진짜인지 내가 꼼꼼히 읽어보진 못했지만, 아무튼 친구들의 저런 지적질에 욥이 얼마나 미치고 팔짝 뛰겠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예전에 한명숙 전 총리가 돈을 받지 않은 걸 증명하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고 얘기한 것도 같이 떠올랐다.


요새 애청하는 드라마로 '피노키오'가 있다. 오늘 마지막 방송인데 본방 사수는 힘들 것 같다ㅜ.ㅜ

암튼, 드라마는 언론 보도로 희생 당한 사람들의 억울함과, 언론을 장악해서 수사 방향을 돌리고, 애꿎은 사람을 희생자로 만드는 권력에 대한 고발을 하고 있는데, 주인공 이종석(최달포)은 아주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늘 빵점을 맞아와서 별명이 '올빵'인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어떤 목표가 있어서 고등학생 대상 퀴즈 프로에 참가 자격을 얻으려고 시험을 백점 맞았다.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믿고는 달포가 컨닝을 했을 거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네가 컨닝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 당연히 달포는 자신이 왜 그런 증거를 대야 하느냐고 따지지만 선생은 요지부동이다. 그러자 이 똑똑한 학생은 눈빛을 달리 하며 이렇게 엄포를 놓는다. 


제가 지금 이 교무실을 나가는 순간, 선생님과 옆의 여 선생님이 바람이 났다고 소문을 낼 겁니다. 두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십시오!


선생은 노발대발하며 "내가 왜 그런 걸 증명해야 해!"라고 소리지르며 자신이 저지른 모순을 깨닫는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어린데도 아주 똑똑했고 스스로를 제대로 방어해 냈지만 그게 가능하거나, 그게 가능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 중 최고는 '슬픔'이 아니라 '억울함'이라고 하는데, 그 말에 크게 공감한다. 저 진도 바다에서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이,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라도 알 수 있었더라면 그 마음의 한은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 아니겠는가. 


짧은 소설 한편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똬리를 틀었다. 정말, 끝까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각 이야기들의 연계성이다. A단편과 B단편이 사실은 같은 주인공 같고, A단편 속 인물 a와 b가 사실은 a와 a'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꼭 같지는 않지만 은희경 작가의 '다른 모든 눈동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가 떠올랐다. 그 작품집에서는 각각의 단편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사실은 시간 차를 두고 인물들이 겹친다. 이 작품도 그런 연결 고리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주 드러내놓고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들을 주는 것이다. 


작품은 역시 이승우구나!라며 감탄하며 읽었지만 다소... 아니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했기 때문에 두번은 못 읽을 것 같다.

나는 신중한 사람이므로, 내 성질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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