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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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소설을 아주 많이 읽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요 근래는 연달아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느낀 것은, 이 타고난 글쟁이들의 맛깔난 솜씨에 내가 연이어 감탄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쟁이들이기에 각별히 표현되고 연출되는 이 이야기들은 평범할 때조차도 단단히 빛이 난다. 어휴, 다들 왜 이리 반짝반짝이는 거야!


시외버스를 타고 처음 K시로 오던 날 그녀는 심하게 멀미를 했다. 싸늘해진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쥐며 남편이 말했다. 낯선 곳이라 멀게 느껴지는 것뿐이야. 자주 다니다보면 가까워져. 이제 곧 서울로 프랑스어 학원도 다녀야지. 당신 꿈이잖아. 그녀는 창밖에 펼쳐진 황폐한 아파트 부지를 바라보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건 진심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해본 말이었다. 남편은 꿈과 비밀을 공유하는 게 사랑의 첫 단계라고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털어놓을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억압된 꿈, 그리고 짧은 일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비밀. 그것은 아버지 집 거실의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던 관상어와 똑같이 투명하게 성장해온 그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남편이 프랑스어 교본을 선물했을 때 그녀는 당황했다. 남편의 의도와는 달리 꿈이 아니라 비밀이 하나 생겨버린 기분이었다. -49쪽


첫번째 이야기가 뜬금 없이 끝나는 것 같아서 적이 당황했다. 응? 이렇게 끝나? 오줌싸다가?? 어여쁜 표제작이 들어간 작품인데 조금 어이 없었다. 게다가 이 작품이 장편일 거라고 여겼는데 단편이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이 작품은 단편 소설 여러 개가 묶여 있지만 그들의 시간은 미래와 과거가 중첩되어 있고, 캐릭터도 겹치며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큰 그림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편들을 묶었지만 크게 보면 장편으로 보아도 문제될 게 없고, 다 읽고 나서야 이야기의 퍼즐이 완성되면서 충만감이 끝도 없이 밀려 온다. 서로 다른 지면에 발표한 작품들인데,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애초에 작정을 하고 쓴 게 아닐까? 놀라운 반전이다! 어휴, 속단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네. 


차라리 쥐약을 놓았어야 했을까. 그녀는 약보다 덫이 확실하다는 약사의 충고를 따랐던 걸 후회했다. 약이었다면 밤새도록 쥐덫을 매단 채 여기저기 부딪혀가며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희망 없는 시간이라면 차라리 지속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그녀를 괴롭혔다. -55쪽


첫번째 이야기에서 나왔던 소심했던,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소녀는 시간이 흘러 억척스런 아줌마가 되었다. 남편과는 위장이혼을 했고, 도피성에 가까운 외국 생활에선 좌충우돌 날마다 전쟁이다. 진정한 의미의 벼룩시장이 그곳에서 펼쳐졌는데, 어휴 이런 분위기가 이곳에서도 조성된다면 내가 내다 팔 물건은 진짜 많은데... 라는 곁가지 생각이 잠시 끼어들었다. 책은 좀처럼 쉽게 내놓지 못하겠지만 악세사리나 옷은 아주 많으니까.


때때로 그해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엄마는 늘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고 집안의 모든 전등을 밝혀놓았다. 소리를 크게 한다고 영어를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불을 켜놓는다고 해서 삶이 명쾌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자기를 둘러싼 어둠에 최소한이나마 저항의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그때 엄마와 한편이 되어준 것은 불행한 여인의 식탁과 초대받지 못한 처녀의 파티 드레스, 그리고 잊혀진 작가의 후회스러운 젊은 시절 등 행복 바깥의 것들이었다. 그때 좀 이상했던 건 사실이잖아. 내 말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보수적인 열세 살이었거든. 엄마는 인생에 대단한 것은 없고 모두가 고독 속에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디기 쉬워진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사라의 죽음이라는 목차에다 자신의 고독을 슬쩍 끼워넣었을 것이다. 죽음같이 센 쪽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앞에 잠시 고독을 내려놓는 것쯤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146쪽


실수만 연발하는 불안한 엄마,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았을 열세살 아들이, 시간이 흘러 그때의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때의 엄마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타인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서라도 힘들게 버틸 응원이 필요했는지......


십팔 년 만의 무더위가 찾아온 그해 여름은 길고도 뜨거웠다. 아스팔트는 열기를 내뿜으며 눅진해졌고 영업사원들의 와이셔츠는 먼지와 땀이 뒤섞여 금세 목깃이 새카매지곤 했다. 식당이나 술집에는 작년보다 훨씬 많은 냉방기와 선풍기가 필요했다. 나무들은 너무 많은 잎을 만든 걸 후회하며 축 늘어져 있었다. 동네 노인들에게 그늘을 뺏긴 고양이는 낮 동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다가 한밤중에야 울타리 밑에서 울었다. K시의 아내들이 얼음 띄운 오이냉국을 만들거나 냉장고 안에 수박을 반으로 쪼개 넣고 남편들의 퇴근시간을 기다렸으므로 상가 지하에는 그것들이 가장 먼저 동났다. 쉽게 잠들 수 없는 열대야가 이어졌고 그런 식이라면 지겨운 여름 하루는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61쪽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던 새댁은 신도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출근한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그녀는 혼자 뜨개질을 했고, 공들여 요리를 했다. 남아서 어찌할 바 모르게 만드는 시간을 무협지로 때우기도 했다. 그녀에게 프랑스어 학원을 다니라고 했던 남편,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다짐했던 남편은, 그렇지만 결혼 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은 물론 한공간에 있는 사람까지도 더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늦은 아침 마루에 나가보니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켠 채 외출했던 차림 그대로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완의 기억에 저장돼 있는 아버지의 모습 중 가장 익숙한 모습이었다. 퇴직한 뒤, 그리고 이혼한 뒤에도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뜻이었다. 늘 남을 외롭게 했고 자신의 외로움을 감추지도 못했다.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시차를 지니고 타인들의 섬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실은 완은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94쪽


그런 아버지를 마침내 떠난 엄마를 아들은 뒤늦게야 이해한다.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지금껏 참아온 엄마의 인내를, 그리고 사랑을...


상관 마. 촌놈 자식. 어머니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나 중요한 것을 세상의 전부로 보고 호들갑을 떨 뿐 아니라 자신과 다르거나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는 무조건 깎아내리고 보는 촌스러움이 싫었다고 했다. 완의 생각에도 거기 비하면 아버지는 자기 방식을 전혀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철저히 방치했다. 그러나 요즘 완이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방치하는 건 방향이 없다는 점에서 대처하기가 더욱 까다로운 폭력이었다. 자기 존중감을 박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을 좌절시킨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어머니의 말을 완은 이제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103쪽


작품 속에서 메인 캐릭터가 되지는 못했지만, 유학 간 완을 짝사랑했던, 다시 만나서 기뻤던, 그러나 끝내 엇갈리고 만 스페인 도둑에 등장한 여자 아이가 마음에 남는다. 그런데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마지막 버스 정류장과 택시 정류장에서 엇갈리던 비오던 날의 두 사람은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였다. 극적으로 엇갈려서 더 아쉬움이 남고 안타까움이 생긴다. 이 책이 연작으로 더 나온다면 혹시라도 그 인연이 다시 이어질까? 


과학자들은 MRI 기술을 이용해 화분 속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촬영했다. 식물은 화분의 안쪽 공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자리를 향해 뿌리를 뻗어나가다가 화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성장을 중단했다. 화분 크기만큼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번지점프에서처럼 화분 속의 식물에게도 안전한 초기 설계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111쪽


은희경의 소설을 아마도 처음 접한 것 같다. 명성을 확인했고 호감도 커졌다. 목소리만 들었었는데 이제 작품을 만났으니 한층 더 가까워졌다. 소녀적인 감성을 지녔지만, 냉정할 때는 한없이 냉정해질 수 있는 강단이 있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도 해보았다. 제목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한번에 틀리지 않고 말하기 힘들 것 같지만, 반가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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