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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가난한 삶에서 피어난 어머니들의 노래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 지음, 구자행 엮음 / 보리 / 2012년 5월
평점 :
예전에 근무했던 학교는 한달에 두번 방통학교를 겸하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 음악 선생님이 방통학교 근무도 같이 하셨는데, 그곳의 나이 많은 학생들이 얼마나 재밌고 열정적인지를 자주 강조하셨다. 그때는 직접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 와닿지 않았는데 그 후 내가 만학도를 대상으로 하는 대안학교에 근무를 해보니 눈으로 목격한 이분들의 배움에 대한 목마름과 열정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기억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되살렸다.
이 책은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의 시를, 이분들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구자행 씨가 엮은 것이다. 평소에는 방송으로 공부를 하다가 한달에 딱 두번만 등교를 하니, 이분들과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귀했겠는가. 그런 소중한 시간을 문제 푸이로만 보낼 수는 없었다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삶을 담아내는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이분들의 삶의 한자락 한자락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다. 꾸며내고 억지로 장식한 것이 아닌, 진솔한 삶이 묻어나는 언어들은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시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읽은 중학생 소녀들의 시보다는 이쪽이 훨씬, 훨씬 더 내 마음을 움직였다.
엄마
강선심 47세
나는 항상 엄마, 엄마다.
익숙한 소리고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다.
엄마, 내 옷 어디 있어 응?
바지는 밑에 서랍, 윗도리는 윗서랍에 있다.
알았다.
그래 놓고는 내일이면 똑같은 말을 또 할 것이다.
희수 엄마, 양말은 어디 있노?
방에 작은 서랍 두 번째 있는데.
알았다.
아! 잠시만 내가 꺼내 줄게.
양말 한 켤레 꺼낼리고 서랍을 온통 뒤집어 놓을 것이 생각나서
내가 찾아 주는 것이 속 편하다.
또 엄마 하고 부른다.
엄마, 방통 수업 몇 시에 들을 끼고?
왜? 좀 있다 할 건데.
그냥. 나도 컴퓨터해야 해서 물어봤다.
수야 엄마, 차 키 못 봤나?
잘 좀 찾아보소.
없다. 수야 엄마가 치운 거 아니가?
마루로 나가 보니 계단 위에 놓여 있다.
여기 있네.
나는 왜 안 보이지 하면서 웃는다.
아침에만 엄마 소리를 대충 스무 번은 듣는 것 같다.
동네 아줌마들도 ‘희수 엄마’ 하고 부른다.
어느 순간부터 희수 엄마가 내 이름이 되어 있었다.
저녁이면 대문 열면서부터
희수 엄마, 오늘 반찬은 뭔데?
아! 더운데 맥주 한잔 없나.
엄마, 우리 통닭 시키 물래? 맥주하고 딱인데.
우리 식구는 이런 하루하루를 행복이라 생각하고 산다.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곳은
경남여고에서 한 달에 두 번
내 이름 선심 씨가 되는 날이다. -28쪽
늘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서만 존재하다가 출석이 불리면서 제 이름을 찾는 여고생 선심 씨! 이름이 불릴 때의 설렘이 진하게 느껴진다. 만학도 분들과 수업할 때, 학생이 꽤 많았지만 매일매일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누구누구 씨~하고 부르면 어찌나 경쾌하게 대답들을 하시는지,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하는 그 시간이 곧 음악이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의미가 있는 일인가. 가끔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호칭 대신 이름을 불러드리는 게 어떨까. 아들 딸 대신 가끔은 친구가 되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부터도~
울 엄니!
조신향 50세
가엾은 울 엄니!
너무너무 보고 싶어 목이 아프네요.
엄마!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 보는 것 같네요.
평생을 황소같이 일만 하시다가
젊디젊으신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가신
보고 싶은 우리 엄니!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보니
작은 단칸방에 사과 궤짝 달랑 하나
그 안에 그릇 몇 개 숟가락 몇 개가 살림살이 전부였다나.
거기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까지
한방에 같이 살아야 했다는 얘기. 허 참!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시집온 지 한 달 만에 어린 색시 혼자 어떻게 살라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군대를 가 버렸다네.
할머니 혼자 두고 군에 가기 걱정되어
엄마랑 서둘러 결혼하신 걸까.
그날 이후 엄마는 시장에 배추 트럭이 오길 기다렸다가
떼어 버리는 겉잎들을 주워 와선
김치도 담고 나물도 하고 국도 끓이고
하시다 보니 굶는 날이 더 많았다는군요.
그 때부터 엄마는 닥치는 대로 양철로 된 큰 다라이에
물건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다 보면 목이 내려앉는 것처럼 아프셨다네요.
어느 날은
머리 가득 물건을 이고 강을 건너다가
불어난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
떠내려갈 뻔했던 적도 있었다네요.
돌아오는 길에 밀가루라도 한 봉지 사 들고 오는 날이면
큰 부자가 된 듯 기뻤다네요.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고
아버지도 제대하셨고
단칸방에 고물고물 동생들과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네.
할머니는 꼭 새벽 네 시면 자는 나를 업고 교회를 가셨다.
교회 종을 치는 사람은 언제나 할머니였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 번도 새벽 기도 빠진 적이 없다 하셨다.
나중에서야 할머니께서 왜 그렇게 새벽 일찍
기도를 열심히 다니셨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늘 구박만 받고 사신 우리 할머니!
언제나 겨울이면 무를 숟가락으로 긁어서
우리들 입에 넣어 주시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선 울 아버지를 낳은 지
돌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는군요.
외동아들이라 오냐오냐 키웠더니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가 돼 버렸다는 할머니의 탄식 소리
울 아버지는
자기밖에 모르고 모든 걸 챙겨 주어야 하고
배려심도 없고 부모 공경도 모르는
그러니 엄마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을까.
성격은 얼마나 불같으셨는지
조금만 마음에 안 차면
집안을 전쟁터로 만드는 바람에
우리 엄마는 평생을 대꾸 한번 못 하고 사셨다네요.
천사표 울 엄마!
우리가 자라면서 보아 온 엄마는
정말 진짜 천사였어도
저렇게 마음이 고울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베풀기를 좋아하시고 심성이 너무너무 고우셨다.
가게를 하시면서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이웃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냄비에 국 끓여 나르기 바빴고
반찬 챙겨 드리고 김치 담아 드리고
새벽 일찍 집 앞 긴 동네 골목을
아침마다 깨끗이 쓸어 놓으시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가게에 오면
꼭 밥 먹여 보내시고
없어 본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알고
굶어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 심정 안다고
꼭 우리 엄마가 그랬다.
동네 어르신들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
세상에 니 엄마 같은 사람 없을 끼라.
자라면서 우리는 엄마에게 한 번도 크게 혼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감싸 주시고
챙겨 주실 줄만 아셨던 엄마였던 것 같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고달픈 삶을 선하게만 살아오신
천사 같은 울 엄니를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엄마!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며칠만이라도 저와 같이 있다 가시면 안 될까요?
꼭 하고 싶었던 말도 많이 있고
해 드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
불쌍한 우리 엄니!
엄마!
정말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68쪽
한 편의 산문을 본 듯한 이 시는 많이 아팠다. 새색시 한달 만에 신랑은 군대 가고 시엄니 봉양하고 산 시간이라니... 이기적이었던 아버지, 그게 미안했던 시어머니, 그럼에도 불평도 없이 그 식솔들 모두 챙기며 베풀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이 이 글 속에 모두 담겨 있다. 마지막 소절을 읽어 보면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러니 울 엄니께도 더 잘해야지!
우리 엄마
정원예 59세
우리 엄마는 앞을 못 보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눈은 누구보다 맑고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일흔여덟 해를 사시는 동안 남을 미워하거나 남을 해친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많이 아프십니다.
볼일 보러 가시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로
누워만 계시는 분이 되고 말았지요.
앞을 못 보는 것도 안타까운데
얼마 전에 대퇴골 수술을 하셔서 다리를 못 쓰는 날이 오고 말았지요.
이런 심정을 그 누가 알까요.
우리 엄마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깔끔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남의 손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마셨지요.
엄마는 자존심이 강한 분입니다. 의지도 강하시고.
자기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우리 사 남매를 아주 잘 키우셨습니다.
남들이 봉사 자식들 더럽다는 말, 남이 손가락질할까 봐
우리들을 너무나도 깔끔하게 키우셨습니다.
그런 우리 엄마가 지금은 가만히 누워서 계십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하는 말에 내 가슴이 찢어지고 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실수를 해 놓고, 내가 얼른 죽어야지 미안하다 미안해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고 또 찢어져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어야 합니다.
엄마 괜찮아. 인생은 돌고 돌아.
옛날에 엄마가 보지도 못하면서
우리들 똥기저귀 치우면서 키웠잖아. 이쁘게 말이야.
그래서 나도 그 빚 갚는 거야.
엄마 나 빚 갚게 아무 말 하지 말고
미안해 하지 마 알겠지.
우리 엄마 이름은 이외출입니다.
출아 출아 우리 출이 수고했다 잘했어 아이구 이쁘네 하니까
눈물 반 웃음으로 고맙다 하셨습니다.
그럭저럭 하루하루가 갑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겁이 나는지
밤이나 낮이나 나를 찾습니다.
희야 있나?
응 왜? 하면
어디 갔나 해서.
엄마 걱정 마. 내가 나가면 간다고 할게 마음 푹 놓아.
그러면 마음이 놓이는지 편안해 하십니다.
밤에는 내 손을 꼭 잡고 주무십니다.
어느 날 엄마가 편안하게 웃는 모습이 얼머나 아름다운지
꼭 천사 같았습니다.
그 웃음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데 너무나 찡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잊지 않을 거요 그 모습 그 화사한 웃음 그 웃음을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웃음만으로도
난 너무나도 엄마의 추억을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엄마 옥황상제의 딸이 되셔서
공주님이 되셔서 꼭 행복하세요 하니까
고맙다 내 꼭 공주님 할게 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길 그 언젠지 몰라도
살아 계시는 동안은 마음 편히 모실게요.
철이 들고 한 번도 엄마를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답니다.
누구보다도 의지가 강하신 분
누구보다도 자식을 사랑하신 분
그 사랑으로 엄마를 사랑합니다. -80쪽
앞의 시와 비슷한 감동을 주었다. 앞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사남매를 깔끔하게, 봉사 자식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애썼을 그 마음이 그려진다. 그리 고생 많으셨던 어머니가 몸도 불편해지셨으니 이 분은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을까. 아기 같아진 마음으로 돌봐주던 자식 곁을 비울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절절하게 아프다. 어린 시절 우리 똥기저귀 갈아주셨던 그 빚 갚는 거라며, 미안해 하지 말라고 엄마 마음 다독여주는 마음은 또 얼마나 크고 깊은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 또 있을까 싶다. 아름답다.
어머니의 눈물
이명자 44세
어느 날 어머니 사촌 오빠께서 오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사촌 오빠께 하룻밤만 주무시고 가시라고 하니
아니다 너 얼굴 봤으니 됐다고 하며 가신다.
어머니는 사촌 오빠 손을 잡고 차머리까지 따라가시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101쪽
짧은 시에 어머니의 그리움이 가득 묻어 있다. 아마도 시집 와서 친정 식구들 자주 못 만나고 사셨던 분 같다. 어쩌면 두 분 사이에 또 다른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짧은 시에서 드라마 한편이 써질 것만 같다.
아버지
윤미정 42세
한때 우리 집은 신발 가게를 하였다. 그날도 새 물건들이 진열장에 진열이 되었다. 그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빨간 구두가 있었다. 아버지 귀에 대고, 나 저 신발 한 번만 신어 보면 안 될까? 옆에 계시던 엄마가 팔아야지 하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눈물이 나서 우는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빨간 구두를 내 발에 신겨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우리 딸이 신어서 예쁘면 다른 사람도 사겠지 하셨다. -112쪽
팔아야 되는 물건이라고 눈 흘겼을 엄마 심정도, 우리 딸이 예쁘게 신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아빠 마음도 모두 크게 공감이 간다. 이런 아버지라면, 아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신발에 대한 미련을 접게 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딸의 편을 들어주면서 예쁜 추억을 남겨주셨다. 사랑이 가득한 시다.
어린 시절 내 고향
유상예 54세
푸른 하늘빛 받아 온 들녘에
수놓아 버린 황금빛 알알
형형색색 들꽃이 피어 있었지
가시 속에 숨어 영글어 터진 알밤 땡감
동무들과 주워 먹으며 좋아라 했던 곳
뒷동산이 있었지
조카 업고 고무줄 뛰고
공치기했던 우리 집 마당
금이 줄줄 그어진 손등에 붉은 빛이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따먹기했던
당산나무 밑이 있었지
장에 간 엄마 기다리며 동무들과
저기 울 엄마다
모두의 엄마가 되어 다가오면
실망하여 한자리에 앉아
한없이 기다리던 곳
바우깨가 있었지
뛰놀다 다치어 빨간 피가 줄줄 흐르면
뛰어가던 동무 집이 있었지
동무 엄마 놀라
된장 한 줌 붙여 동여매어 준
동무 집이 있었지
내 고향 산촌 그대론데
둘러봐도 둘러봐도
어버이 모습 보이지 않고
텅 빈 우리 집
삶의 무게 못 이겨
어리광 부리고 싶어 찾은 곳은
떼 덮인 어버이 집
옛적 어머니 모습 되어 술 한 잔 따라 놓고
나 거기 엎드려 있네
내 고향에 -119쪽
장에 간 엄마 기다리다가 저기 울 엄마다! 소리에 모두의 엄마가 되었다가, 이내 실망하며 다시 앉아 기다리던 고향 모습이 한편의 그림처럼 지나간다. 이 시처럼 가슴 가득 품을 '고향'의 이미지가 내게는 없지만, 이런 그리움은 상상해볼 수 있다. 삶의 무게가, 삶의 시간이 느껴지는 묵직한 시다.
커피 한 잔
남정임 40세
길가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았다.
향긋하고 진한 커피
기뻐할 그분 얼굴이 떠오른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집
좁고 가파른 계단을 두어 번 지나면
옥상이 나오고 회색빛 강아지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방문에서 뛰쳐나온다.
어머니, 봉생복지관에서 나온 아줌맙니다.
방문 앞에 서면 번들거리는 회색 가구와
미풍으로 돌고 있는 선풍기
자리에 누우신 어르신은
영원히 눈을 감고 있을 것처럼 누워 계신다.
안녕하세요?
눈을 뜨고 한참을 보고서야 작은 미소가 번지며
어서 와.
커피 드세요.
이번엔 더욱 기쁜 얼굴을 하신다.
삼십 원이지?
몸을 지탱하기 힘든 팔은 내 몸을 기둥 삼아
난 손목에 힘을 주어 안는 듯이 일으켰다.
죄송한 마음이 든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온 힘을 다 모으고 기대앉는 것이다.
예전에 군인이셨다.
여군! 얼마나 당당한 모습이셨을까.
아마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좋고 싫음이 분명한 여군이었을 것이다.
일그러져 있던 얼굴은 다시 평온을 되찾아서
참으로 귀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신다. -150쪽
커피 한잔이 이리 귀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자판기 커피 30원 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독거 노인분이 여군이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시를 쓰신 분은 복지사 같은데 일상과 감정이 잘 어우러져 이분이 느끼는 감정이 독자에게도 전달되고 있다.
이명자 51세
나는 비가 참 좋다.
우리 아들은 구질구질한 비가 왜 좋냐고 묻는다.
아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 것인가.
언제나 바쁘게 살아온 나는
비가 오는 날은 쉴 수가 있었다.
낮잠을 잘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며 추억에 잠길 수도 있고
몸도 마음도 쉴 수가 있으니 비가 오면 행복했다.
지금도 비가 오면 행복해진다.
신호등이 없는 길을 골라 그냥 걷는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닷가를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법당에 홀로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곳이 극락이다. -159쪽
얼마나 고단했으면 내리는 비가 반가웠을까.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극락을 찾아내는 소박한 마음에 인생의 깊이가 느껴진다. 지금 이시간,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두 해 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심지어 다리가 부러져도 결코 결석 없이 열심히 학교에 다니시던 분이 떠오른다. 이 책을 먼저 알았더라면 그때 선물로 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책에 시를 쓰신 많은 어머니들은 대부분 제때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신 분들이다. 나이 마흔은 아주 어린 편이고, 쉰 넘고 예순 넘는 분들도 아주 많았다. 그 나이에도 배우고 싶은 욕망과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싶은 마음은 지극히 간절하다. 형편 때문에 학업을 못 마칠까 전전긍긍하는 마음, 가족에게 차마 밝히지 못해서 발 동동굴리는 마음, 혹은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행복하게 공부하는 학생까지, 아주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이분들을, 또 지금도 힘들게, 열심히 공부하시는 늦깍이 학생들을 모두 응원한다.
가난한 삶에서도 하얗게 꽃을 피워낸 어머니들의 노래가 참으로 아름답다. 이렇게 일상에서 시를 써내는 삶이라면, 삶조차도 노래로 다시 피어나리라.
도시락 오석엽 59세 오늘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생각했다. 내 초등학교 때, 도시락을 싸 가면 옥수수 급식을 못 타 먹기에 엄마는 절대 못 싸게 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너무 먹고 싶었던 도시락. 엄마 몰래 한 번 싸 가서는 부끄러워 결국엔 혼자 웅크리고 먹었던 도시락.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을 일구어 주는 오늘 이 순간 방통 점심시간. 행복하여라. -43쪽
진흙 속 한 줄기 연꽃 서옥자 67세 예순이 넘어서야 내 손으로 내 인생 열었구나. 반백 년 전 시골뜨기 말총머리 소녀가 고등 교육 유학길. 영리하지도 못했는데 가정의 울타리 속에 묵묵히 작은 일이라도 도우며 쉬운 서적이라도 읽곤 했으니. 가는 세월에 적응하면서 비바람도 맞고 돌부리에 부닷치기도 하면서. 이젠 겨우 필 들고 살아가니 진흙 속이 아니면 한 줄기 연꽃은 필 수 없구나. -49쪽
감자 최윤선 40세 시골에서 돌아온 남편 손에 박스 하나가 들려 있다. 알알이 여물은 감자가 가득 담겼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저랑 동우랑 감자 억수로 좋아하는데예. 그래 올해는 씨알이 작다. 아닙니다 삶아 먹기 딱 좋아예. 잘 먹겠습니다. 고생은 어머니 아버님이 하시고 저희는 먹는 거만 잘하네예. 죄송합니다. 아이다 비가 와서 다 못 캤다. 나중에 캐면 또 부치 주께. 작으나따나 무라. 예 어머니 때 잘 챙겨 드세요.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 뼈마디 굵어 계신 시어머니 생각에 죄스러웠다. 문안 인사도 자주 못 하는 내가 뭐 이쁘다고 어머님 아버님 사랑합니다. 알콩달콩 잘 살게요. 어머니 감자가 참 맛있어요. -56쪽
아부지 이재언 46세 아버지는 어부이셨다. 바다에 나가시지 않은 날은 우리 삼 남매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하셨다. 우리 삼 남매가 배 깔고 엎드려 공부하고 있으면 옆에 가만히 앉아서 연필을 깎아 주곤 하셨다. 예쁘게 깎아서 필통에 길이 순서대로 나란히 넣어 주셨다. 아이들이 연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도 아버지 생각하면서 내 손으로 연필을 깎아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도 엄마 어렸을 적에 손수 깎아 주셨노라고 그러면 아이들이 물어본다. 엄마, 외할아버지도 연필을 이렇게 못난이로 깎았어요? 그 소리에 연필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못난이처럼 깎아 놓은 것 같았다. -62쪽
내 새끼 이숙조 42세 삶이 너무 팍팍해 앞만 보며 동동거렸습니다. 비 오는 어느 휴가 날 베란다에서 내 새끼 등굣길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눈물에 흐릿하게 멀어져 가는 조그마한 등이 하늘만큼 크게 가슴에 쿵 박혔습니다. 조금 늦게 낳아 언제나 가슴 저린 내 새끼는 그렇게 제 인생의 발자국을 조금씩 내딛고 있었습니다. 이제 여덞 살 내 새끼가 말입니다. -76쪽
시장에서 배영자 50세 빈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탔다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도 서서히 깬다. 얼마 가지 않아 내렸다. 새벽 시장이다. 입맛 없는 여름철 아이들이 생각나 열무 세 단 샀다. 그리고 뭘 살까? 뭘 살지 계획도 없지만 그냥 시장에 온다. 한 소코리 주이소. 막내딸이 좋아하는 참외다. "곱고 점잖하이 참 예쁘지만 아지매도 많이 늙었네요." 이십 년도 넘게 다닌 시장이다. 과일 장수 아저씨도 나물 파는 할머니도 나도 그 세월을 함께 보아 가며 늙었다. 인사도 안부도 묻진 않지만 시장에서 볼 수 있으면 다 무사한 거다. 세월 따라 늙어야지요, 많이 파이소. -148쪽
내 탓이다 문명숙 53세 따르릉 알람 소리 천근만근 모뭉아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 물만 바르고 계란 후라이에 야구르트를 서서 넘긴다. 치약 냄새만 풍기고 손을 흔들며 일터로 나갔다. 힘 좋은 날들을 베짱이처럼 보내고 개미가 되어 보려 하지만 무거운 짐은 이 땡볕에 더 부풀고 흰 머리카락은 햇빛에 더욱 빛난다. 젊은 날을 내 탓 아닌 당신 탓이라고 애들 때문에 산다고 최선을 다한 삶을 살지 못한 탓에 이 햇빛 좋은 날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가슴을 엔다.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 나오는 구절 -174쪽
그네 마은희 52세 운동장 한 곁에 저 혼자 뛰는 그네 누가 뛰었길래 여지껏 흔들리고 있는가 그곳에 그네는 아직 흔들리고 있을까? 그네는 멈추었는데 나 홀로 흔들리고 있구나 -184쪽
202 구자행(엮은이) 평생 시 근처도 안 가 보신 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셨을까.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삶에서 글이 나오고 시가 나오는 법이니까. 시는 시인들만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또 한번 증명된 셈이다. ‘지도’란 말은 부끄럽다. 나는 별로 한 게 없다. 지난밤 내린 봄비에 꽃이 활짝 피듯이 그렇게 시가 피어났다. 공부 시간에 시를 들고 가서 읽어 주면 모두 자기가 쓴 것처럼 기뻐한다. 내가 시평을 무어라 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하고 기다리신다. 그래, 시가 선생이지!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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