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판사 퐁퐁이 - 이야기로 배우는 법과 논리, 제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기획 부문 수상작 사회와 친해지는 책
김대현.신지영 지음, 이경석 그림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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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 환상적인 책이다. '사회와 친해지는 책'이라는 카테고리가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현재 맡고 있는 과목이 '법과 정치'인데, 나한테도 어려운 책이다. 왜 이 교과를 굳이 선택해서 달랑 하나 있는 사회 과목을 이걸로 가르치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게 교과가 짜여 있는 탓에 우리 학교 학생들은 법과 정치를 배우고 있다. 비록 이 책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지만 고등학생이더라도 '법'이라는 것이 너무 어렵고 멀기만 한 학생들이 읽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야기로 배우는 법과 논리'라는 부제가 딱 들어맞는 너무리 판사 퐁퐁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야기에 들어가며 너구리 판사 퐁퐁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행복 마을의 퐁퐁이 판사는 어떤 분쟁이 일어나도 그걸 현명하고 공정하게 풀어주는 명판사였다. 행복마을의 포청천이랄까.


이 책에는 모두 다섯 개의 사건 파일이 나온다. 아래 그림을 보자.



아주 실한 배추 농사를 짓고 있는 황소와 거저 줘도 안 먹을 것 같은 배추를 농사 짓던 족제비가 재판장에 불려왔다. 이번에도 잘 여문 배추를 팔러 나온 황소는 고갯길에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은 채 경운기 바퀴에 버팀나무를 걸고 잠시 농산물 시장 지배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장사 망친 족제비가 황소의 배추 경운기를 보고 짜증이 나서 바퀴를 발로 차버렸는데, 그 바람에 바퀴를 받쳐놓은 나뭇조각이 튕겨나가 경운기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진 것이다. 결국 황소의 배추는 모두 망가져버렸다. 당연히 황소는 억울해 했고, 족제비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퐁퐁이 판사는 이 일에 족제비의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우리의 정서적 판단과는 제법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판결이 나온 것일까? 퐁퐁이 판사는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해 준다.


책에는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법정의 단골 대사도 등장하는데, "이의 있습니다! 표범의 말은 저에 대한 인신공격입니다." 같은 게 그런 것이다. 적재적소에 궁금하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족제비가 황소의 경운기 뒷바퀴를 찬 것은 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은 거였고, 그것은 황소가 저지른 실수였다. 비록 족제비가 발로 차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안 났을 수도 있지만 그건 사실 모르는 일이다. 났을 수도 있다. 좀 더 쉬운 보기도 들어준다. 


부실 건축한 건물이 있는데, 마침 주변을 지나던 오소리가 축구공을 건물의 벽으로 찼는데, 그 공을 맞은 순간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렇다면 오소리 때문에 건물이 무너진 것일까? 건물이 무너진 것에 대해 오소리가 책임을 져야 할까? 


이렇게 실례를 들어 보면 왜 족제비에게 책임이 없는지 이해가 쉽게 된다. 


물론, 황소는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들수도 있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브레이크를 확실히 걸고 경운기를 세워두는 습관을 가질 것이다. 현명한 퐁퐁이 판사는 이긴 게 다가 아니라는 소중한 진리도 가르쳐준다. 잘못에는 '도의적인 책임'이란 것도 있으니까. 


다섯 개의 판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두번째 이야기였다. 잘못된 생각을 가졌는데 결과는 좋게 나왔을 때, 그때 어떤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사례였다.



과실과 미수는 완벽하게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하나씩 부족합니다. 과실은 '나쁜 생각'이 없는 행동이고, 미수는 '나쁜 결과'가 없는 행동이죠. 그러므로 과실이나 미수에 해당하는 행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행동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혹시 책임을 묻는다 하더라도, 나쁜 생각을 가지고 나쁜 결과를 가져온 행동에 비해 가벼운 책임을 물어요. -55쪽


과실, 미수와 같은 단어는 자주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정확히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무척 쉽고 재밌게 설명해 주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도 나왔으면 더 좋았으련만...^^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할 수 있으려면 그가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경우여야 해요. 만약 누군가가 도저히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도,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죠.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니까요. -79쪽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액자 구조가 이 책에는 무척 걸맞는 옷이 되어버렸다. 소소한 유머 감각도 돋보이고, 행복 마을의 동물 친구들이 비록 모습은 동물이어도 인간들처럼 살고 있기에 더 정감있고 설득력이 있었다. 글을 쓰고 기획한 사람이 두분인데 두 작가님이 머리를 맞대어 근사한 공동작업을 내놓은 듯하다. 더불어 '창비 좋은 어린이책 수상작'이라는 마크도 함께 빛을 발한다. 믿고 고르는 책의 약속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행복 마을에 '모든 빗방울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라는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빗방울이 하늘로 올라갈 리는 없겠죠. 법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법에 우선하는 이치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권도 이러한 가치에 해당합니다. 행복 마을의 모든 시민은 어떤 경우에도 종족과 성별, 종교, 취미 등에 의해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행복 마을 시민들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그 어떠한 법보다도 위에 있는 가치입니다. 어떤 법도 그 가치를 해쳐서는 안 되죠. 

따라서 설령 우리 손으로 뽑은 대표가 나쁜 법을 정한다 하더라도, 그 법이 자연의 이치나 인권과 같은 가치를 거스른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133~134쪽


백번 옳은 지적이다. 더군다나 선거날에 이 부분을 읽으니 더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재미와 감동과 교훈을 함께 주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책날개를 펴보니 '사회와 친해지는 책' 시리즈가 여덟 개가 더 있다. 차차 찾아 볼 생각이다. 특히 '내가 원래 뭐였는지 알아?'가 눈에 들어온다. 도깨비가 낸 수수께끼를 풀며 옛날 살림살이를 배운다고 하니 재미와 지적정보를 함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딱 좋아하는 조합이다! 빠른 시간 안에 만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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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6-0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훌륭한 책이..어른인 제가 읽어도 무릎을 칠만큼 설명이 친절해요!! 제가 어릴 적 저런 책이 있었다면 정말 법없이도 살 사람이 됐을텐데요.

마노아 2014-06-06 12:25   좋아요 0 | URL
제가 바로 무릎을 치며 읽은 1인입니다. ㅎㅎㅎ
저 어릴 때 이런 책을 읽었으면 저도 법 없이 살 사람이 됐을 텐데 말입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