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포장마차는 오랜 기간 지친 직장인들을 위로해 주던 서민들의 쉼터였다. 그리고 이 포장마차에는 떡볶이, 어묵,
닭똥집, 오돌뼈, 곰장어와 같은 우리나라 고유의 먹거리가 풍부했는데, 홍합탕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안주다. 우리나라 해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홍합은 술안주뿐 아니라 많은 요리의 재료로 쓰이고 남녀 모두에게 오랫동안 사랑 받아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즐겨 먹는
홍합은 저 멀리 지중해에서 온 것이다. 원래 홍합은 토산종(그 지방에서 특유하게 나는 품종) 담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1950년대에 경남 지역에 지중해 담치가 유입된 이후, 고유종 홍합은 동해안 일부에만 서식하고 있다. 지중해 담치라고 불리는 이 외래종 홍합은
지중해가 고향이다.
달팽이보다 느린 홍합이 어떻게 저 멀리 지중해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언뜻 생각하면
미스터리처럼 느껴지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게다가 지중해 담치는 번식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편이어서 우리나라 토종 홍합의 영역을 대부분 빼앗았고 이제는 국내에 완전히 정착해 양식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지중해 담치는 배를 타고 왔는데,
그렇다고 정식 수입을 위해 배에 태워진 것이 아니다. 지중해나 유럽에서 들어오는 배의 평형수(ballast water)에 섞여서 우리나라
바다로 들어온 것이다.
배에 화물을 실으면 배의 무게가 증가해 가라앉고, 배에서 화물을 빼내면 배의 무게가 가벼워져서 물
위로 뜨게 된다. 따라서 배를 적절한 수심에 떠 있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의 무게를 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배는 일반적으로
‘평형수 탱크(ballast tank)’를 갖추고 있다. 화물을 내릴 때에는 그만큼의 무게에 해당하는 물을 평형수 탱크에 채워 넣어서 무게와
수심을 유지하고, 거꾸로 화물을 실을 때에는 채워져 있던 평형수를 외부로 버려서 전체 무게와 수심을 유지한다. 일반적으로 평형수는 배
주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바닷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유해수중생물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해상을 통한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오늘날 이렇게 이동하는 평형수의 양은 연간 100억 톤 이상에 달한다. 또한 이를 통해 연간 7,000종 이상의 생물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때 병원균을 포함한 외래 생물종이 해양 생태계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박 평형수 및 선체 부착에 의한 외래 생물의 침입은 전 세계 해양 환경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토착
생태계 변화, 어장의 고갈, 병원균 전염과 같은 수많은 생태 문제는 물론 인체 독성 유발 등의 건강상 문제까지 유발한다.
우리나라의 주요 항구가 있는 연안 해역을 대상으로 외래 생물종에 대한 실태 조사를 벌인 결과 지중해 담치, 유령멍게와 같은 외래
생물종이 18종이나 정착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중해 담치는 양식 동물의 부착과 성장을 방해하고 토종 홍합의 서식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유령멍게는 죽으면 물밑에 가라앉아 바닷물을 오염시킨다. 북태평양산인 아무르불가사리는 조개류를 무차별적으로 포식한다. 인천, 제주, 온산
등에서 발견된 포르세라갈파래는 해양의 녹조 발생률을 높인다. 이것은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요트 경기를 앞두고 칭다오 일대를 덮쳐 중국
정부에 수천 억 원의 재정 손실을 입힌 녹조와 같은 종이다.
전문가들은 해양 외래 생물이 국내로 유입되는 가장 큰 원인이
선박 평형수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에 국제해사기구(IM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는
2004년 2월 74개국 정부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배의 평형수 관리를 위한 국제 협약을 채택했다. 이 협약으로 국제 항행에 종사하는 모든
배는 2017년부터 평형수 처리 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평형수 처리 장치는 평형수 및 침전물 내에 유해 수중
생물이 배출되거나 주입되는 것을 예방하고 제거하는 장치를 말한다. 이를 위해 기계적, 물리적 그리고 화학적인 처리 기술을 사용한 다양한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다.
기계적인 처리 기술의 대표적인 방법은 일종의 필터인 여과기를 설치하는 것으로, 평형수만 빠져나가고
유해수중생물은 통과할 수 없도록 거르는 것이다. 50μm(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 정도의 아주 미세한 여과기를 사용하는데,
장치가 간단하고 비교적 많은 양의 평형수를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50μm보다 작은 수중생물은 처리하기 어렵고, 여과기가 막히면 이를
교체하거나 막힌 여과기를 뚫기 위한 추가 장비가 필요하다.
물리적인 처리 기술은 자외선의 살균 작용을 이용해 평형수 내의
유해생물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없애는 방법이다. 하지만 유해 생물이 변이를 하거나 다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선박 평형수를
일정 온도 이상으로 가열해도 수중 생물을 살균시킬 수 있으나, 이 경우에는 배출하는 물의 온도가 높기 때문에 배출되는 항구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화학적인 처리 기술은 오존을 이용해 생물을 살균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오존의 경우 살균
효과는 뛰어나지만 시설비가 고가라는 단점이 있다. 또한 전기 분해를 이용해서 유해 생물을 살균하는 방법은 살균 효과가 뛰어나지만 선체가 부식될
우려가 있고 장치가 고가라는 단점이 있다.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다양한 평형수 처리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평형수 처리 장치
개발은 이제 시작되는 단계로 당분간은 여러 가지 기술이 적용되고 검증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기술로 평형수를 처리하거나 여러 가지 기술을
조합해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형수 처리 기술 개발은 해양 생태계의 파괴를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신규 시장이 열리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재 국제해사기구의 승인을 받은 관련
기술 31건 가운데 11건(35.5%)을 국내 기업이 보유하고 있고, 지난해 기준(2013년)으로 평형수 설비 시장의 수주액 7900억 원
가운데 4585억 원(58.0%)을 국내 기업이 달성했다.
우리나라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뿐 아니라 많은 중소기업에서도 자체적인 연구 개발을 통해 기술 개발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앞으로 열리는 평형수
처리 장치 시장이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에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글 : 유병용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