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구판절판


라당의 여인들

올해는 감자 수확이 좋지 않지만
라당의 여인들은 우울해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밭을 오르내리면서도
소녀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대화한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죠.
풍년에는 베풀 수 있어 좋고
흉년에는 기댈 수 있어 좋고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하고 웃음을 짓는 거죠.”
- 21쪽

마당에 모여 앉아

가장 가난하여 가장 높은 곳에 살아가지만
정결하고 단아한 살림 솜씨가 빛나는 집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노을이 물든 마당에 모여 앉아
수확한 감자와 갓 볶아내린 향긋한 커피를 마신다.
“아이가 자라서 라당의 농부가 되면 좋겠어요.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 23쪽

천연설탕
아렌

아렌 설탕은 맛이 좋고 건강에 좋아 널리 애용된다.
소년 시절부터 야생 숲을 누비며 살아온 우딘(60).
십 미터가 넘는 나무를 타고 올라 수액을 받아내고
서서히 달여 아렌 설탕을 가내생산해왔다.
인도네시아에는 자연이 길러준 것들을 거두어
채취경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약 1만 년 전 농경정착을 시작하기 전까지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취로 살아왔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다 공짜다.
- 31쪽

하늘 호수의 고기잡이

하늘빛이 맑은 물에 그대로 비쳐
‘하늘 호수’라 불리는 타와르 호수.
아버지는 고기를 잡고 아들은 낡은 배의 물을 퍼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고요한 호수처럼 말이 없어도
서로의 몸짓에 의지하며 서로를 깊이 느끼는 듯하다.
부모란 이렇듯 아이와 한배를 탄 좋은 벗이 되어
그저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고 삶으로 보여주며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사이가 아니겠는가.
- 53쪽

가장의 걸음

산정 외딴집의 가장이
자신이 기른 묵직한 양배추를 지고
십 리 길 아랫마을 장터로 나간다.
어깨는 무거워도 사랑이 가득 담긴
아내와 아이의 배웅을 등에 받으며
맨발로 내딛는 가장의 걸음에는
할 일을 다한 자의 당당함이 실려 있다.

- 55쪽

벌거숭이 아이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야 어디서나 흐뭇하지만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특별히 감동이다.
이 땅은 네덜란드와 일본의 350년 식민지 나라,
그들은 저항운동의 싹부터 말리고자
초등학교부터 아예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독립저항의 주체인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잔인한 책략이다.

브랜따 항구 갯벌에서 벌거숭이로 뒹구는 아이들.
아이들은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잠자고
마음껏 꿈꾸도록 그저 자유의 공기 속에 내비두면 된다.
자기 안에 이미 온전한 무언가를 다 품고 있으니.
- 63쪽

아빠의 ‘시간 선물’

수확을 마친 농부 아빠가 아들과 놀아주고 있다.
“이 의자는 아이가 처음 말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이 목마는 아이가 첫걸음마 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오늘은 대나무 깎아 새장을 만들어 줄 거예요.”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 69쪽

파도 속에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다

2004년, 쓰나미가 아체 주민 수십만 명을 쓸어갔을 때
울렐르 마을은 가장 먼저 해일이 덮치고
가장 처참히 파괴된 거대한 폐허의 무덤이었다.
당시 울렐르 마을의 스물다섯 살 청년 사파핫은
손가락만 한 나무를 홀로 바닷물 속에 심고 있었다.
“이 여린 바까오 나무가 지진 해일을 막아줄 순 없겠지요.
하지만 자꾸 절망하려는 제 마음은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릎을 꿇고 나무를 심던 사파핫은 끝내 파도처럼 흐느꼈다.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가느란 바까오 나무가 파도 속에 자라나 숲을 이루었고,
그는 오늘도 붉은 노을 속에 어린 바까오를 심어가고 있었다.
절망의 바닥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은 희망이 아니지 않느냐고.
파도는 끝이 없을지라도 나는 날마다 나무를 심어갈 것이라고.
- 73쪽

짜이가 끓는 시간

하루에 가장 즐거운 시간은 짜이가 끓는 시간.
양가죽으로 만든 전통 풀무 마시키자로 불씨를 살리고
갓 짜낸 신선한 양젖에 홍차잎을 넣고 차를 끓인다.
발갛게 달아오른 화롯가로 가족들이 모여들고
짜이 향과 함께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 99쪽

아프간 난민촌 소녀의 꿈

파키스탄에는 160만의 아프간 난민이 살고 있다.
국경 인근의 유서 깊은 페샤와르는 ‘꽃의 도시’라는 뜻인데
지금은 ‘총의 도시’가 되어 하루걸러 총성과 폭음이다.
고향에서 피난올 때 엄마가 품고 온 어린나무에
소녀는 매일같이 물을 주며 귀향의 날을 기다린다.
“아프간 제 고향으로 꼭 초대할게요.
달콤한 석류랑 포도랑 살구 케이크랑 듬뿍 먹고
우리 함께 파란 하늘에 연을 날려요.
이 나무가 제 키만큼 자라면 꼭 돌아갈 수 있겠죠?”
아, 기다림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만 리 길도 걸어간다.
- 107쪽

코너에 몰린 생의 아이들

미군의 폭음과 홍수가 휩쓸고 간 오지 마을.
영하의 추위에 난로도 외투도 양말도 없고
책걸상도 공책도 칠판도 선생님도 없다.
자습이 끝나자 늘 허기져 눈만 큰 아이들이
품에 싸온 제 몫의 감자 한 알을 나에게 내민다.
아,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지구의 벼랑 끝, 막다른 코너에 몰린 생의 아이들.

- 113쪽

파슈툰 소년의 눈동자

10년 넘게 계속되는 미국의 침공 속에 자라난
파슈툰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
한 생에 겪을 고통과 비극을 다 보아버린 눈동자.
만년설산이 들어박힌 저 푸른 눈빛, 아니 푸른 불꽃.
부모를 잃은 어린 가장인 알람샤를 안아주자
만년설이 녹아내리듯 소리 없이 긴 눈물을 흘린다.
나는 한번만이라도 이 아이들의 웃는 모습과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기를 바랐다.
눈물 젖은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나는 신神을 본다.
거대한 성전이 아닌 이 눈동자에서 신神을 만난다.

- 117쪽

쌀과 총

‘다섯 줄기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끝이 보이지 않는 비옥한 곡창 지대 펀자브.
페르시아, 아랍, 영국도 탐을 내던 지역이다.
소작농들 주위에는 대지주들이 고용한
무장 경호원들이 총을 들고 감시 중이다.
독점하는 자는 어디서나 총구에 의지하고
독식하는 자는 언제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정직한 쌀에는 총이 필요없다.

- 131쪽

어린 양을 등에 업고

며칠 전에 태어난 어린 양을 등에 업고
양떼를 몰고 멀리 풀밭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 아이는 아직 풀도 못 먹고 잘 걷지도 못하지요.
어미 젖을 먹이고 햇살도 바람도 먹여야지요.
이 녀석들 모두 이렇게 제가 업어 기른 양들이랍니다.”
- 135쪽

내가 살고 싶은 집

높고 깊은 산맥에 소중히 숨겨진 가쿠치 마을.
흰 만년설과 푸른 하늘과 붉은 흙집과 노란 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가을날.
남자들은 산 위에서 야크를 치고 땔감을 구하고
여인들은 양털을 자아 옷감을 짜고 빵을 굽는다.
따사로운 가난마저 고르게 빛나는 마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작은 흙집.
마음까지 환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집.

- 142쪽

아름다운 배움터

한 자리에서 11개의 만년설산을 볼 수 있는 마을.
봄이면 살구꽃 자두꽃 앵두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노란 포플러잎과 빨간 사과가 마을을 물들인다.
맑은 햇살이 비추고 신선한 바람이 불 때면
아이들은 답답한 교실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배운다.
지식 경쟁의 제도화에 얽매이기 이전의
마을 속 학교는 아름다운 삶의 배움터다.
- 147쪽

내 손으로 집 짓는 날

식구가 늘어나 집을 늘려 짓는 날.
기분 좋은 부인은 도와주는 이웃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다니며 고마움을 전하고
남편은 물담배를 피우며 기운을 돋운다.
뜨거운 지열과 습기와 맹수로부터 안전하기 위ㅏ해
한 층을 비우고 한 층 높게 짓는 지혜의 건축.
살던 집과 새 집은 나무다리가 연결한다.
집이란 이렇게 사고 파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내삶의 무늬를 새기며 오래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지상의 단 하나뿐인 기억과 소생의 장소이니.

- 167쪽

고산족 마을의 수력 발전

라오스의 산간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주민들은 지혜를 모아 강보에다 나무와 폐품을 조립해
자력으로 마을 수력발전소를 창조해냈다.
자연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자연의 힘을 살려 쓰는
개전個電은, 거대 독점 시스템도 고압송전의 낭비도 없고
블랙아웃과 전기세 걱정도 없는 최고의 적정기술이다.
전기는 태양과 바람과 강물을 타고 흘러야 한다.
방사능과 석유와 약자의 눈물을 타고 흐르는
눈부신 세상은 인간의 어둠에 다름 아니기에.

- 187쪽

아카족 마을의 햇살 학교

지도에도 없는 깊은 산 속의 아카족 마을.
고운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짝을 지어 학교에 모여든다.
선생님은 아이를 등에 업은 동네 이모다.
아빠들이 짜준 책상에 하나뿐인 책을 놓고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우다 공부 삼매경에 빠져든다.
누가 공부 잘하냐고 물어보자 서로 어리둥절하다가
“다 잘하는데요, 이 친구는 셈을 잘하구요
저 오빤 나무 타고 과일을 잘 따구요
얜 물고기를 잘 잡구요 전 노래를 잘해요.
아참, 저 이쁜 언니는 최고의 날라리래요.”
- 197쪽

꽃다운 노동

물 위에 떠 있는 광활한 농장 쭌묘는 최고 품질의
채소를 길러내는 버마 농산물 생산의 심장부다.
이 쭌묘에서도 심장부는 불전에 바치는 꽃밭이다.
버마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소득의 1/10을 바쳐
꽃을 사고 매일 아침 불전에 올리며 기도를 드린다.
덧없이 사라질지라도 삶은, 밥보다 꽃이 먼저라는 듯이.
꽃을 기르는 마 모에 쉐(21)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쭌묘에서 꽃밭을 가꾸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은 제 손에 향기를 남기지요.
꽃을 든 사람들의 미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처님께도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거예요.”
- 213쪽

오리와 소녀의 행복한 산책

아침 햇살 빛나는 만달레이 타웅따만 호숫가에
오리를 치는 소녀 판이쀼(16)가 나타나자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오리들이 금세 모여들어
새 을乙 자로 줄지어 산책을 나선다.
“꼬마 때부터 오리들과 함께 놀았어요.
기도할 때마다 오리들이 아프지 않게 빌어요.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을 아나 봐요.”
드넓은 호숫가를 노닐며 산책하는 오리들도,
오리들의 친구가 되는 소녀도 행복한 아침이다.
- 228쪽

들꽃 귀걸이를 한 소녀

부드러운 아침 햇살 아래 열세 살 소녀 마 모우가
손수 짜 만든 대나무 멍석 앞에서 첫 손님을 기다린다.
이 무거운 짐을 이고 세 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 내려왔건만,
낡은 옷은 풀을 먹여 빳빳하고 검은 머리는 곱게 빗어 묶었다.
힘든 노동 속에서도 이처럼 지극한 정성과 아름다움이 살아있고
자신의 인생이 깃든 생산물은 이토록 당당한 자부심으로 빛난다.
“우리 마을엔 전깃불은 없지만 철마다 꽃등불이 가득 피어나요.
너무 멀어 다 데려올 수 없어서 한 송이만 제 귀에 걸고 왔어요.”

- 231쪽

즐거운 나의 강

작은 마을들을 감싸 흐르며 인레 호수로 향하는 인떼인 강.
여인들은 빨랫방망이를 두들기며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물장구치며 놀다가 물고기를 잡고
물소는 몸을 씻겨주는 주인의 손길에 기분 좋게 목을 축인다.
내가 사는 가까이에 있고 내 몸과 기억 속을 흐르는 강.
강의 생명은 콘크리트 댐 속의 많은 물이 아니다.
강의 생명은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물이다.

- 234쪽

맨발의 입맞춤

인디아 여성 농민들은 논밭에서 맨발로 일하고
흙길에서도 맨발로 걷기를 좋아한다.
신발을 살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지는 인간을 품어 기르는 신성한 몸이기에
맨발로 정중한 입맞춤을 하는 게 도리인 것이다.
맨발에는 금과 은으로 된 발찌와 발가락찌로
정성을 다해 치장하고 늘 청결하게 씻는다.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
대지에 뿌리박은 삶에서 행복이 차오르는 것이니.
286

- 275쪽

물 항아리 머리에 인 여인의 걸음

물 항아리 머리에 인 여인의 걸음으로 깨어나는 인디아의 아침.
묵직한 물 항아리를 이고 걸으면 등허리와 목선이 곧게 펴지고
단전에서부터 온 몸에 기운이 차오르는, 최고의 일상 요가가 된다.
인디아 여성의 늘씬한 몸매와 우아한 자태는
날마다 물 항아리를 이고 걷는 노고의 선물인 것만 같다.
고귀한 것은 늘 무거운 것, 고귀한 짐을 아름답게
이고 지고 가는 자가 고귀한 사람인 것을.
- 286쪽

푸른 초원 위의 낮잠

고단한 유목의 계절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온 청년이
수고했던 말들을 풀어놓고 초원에 누워 낮잠을 잔다.
순백의 구름은 유유히 떠가고 들꽃 내음은 향기롭게 흐르고
보리를 베는 여인들의 노래 소리는 바람결에 실려온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청년은 지구를 배경 삼아
푸르른 초원에 누워 깊고 달콤한 낮잠을 누린다.

-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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