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24 호/2014-05-07

[이달의 역사]대항해 시대를 연 캡틴 쿡의 일생

 

[이달의 역사] 코너에서는 ‘과학자의 열정과 삶을 돌아보다!’라는 주제로 과학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과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과학적 열정을 다루고자 합니다.


캡틴 쿡으로 잘 알려진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은 영국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항해 시대를 연 장본인 중 한 명이다. 1747년 18살이 된 쿡은 석탄 운반선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영국 해안을 오가며 항해술을 익힌 후 보다 넓은 바다를 동경하여 1755년 영국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그의 항해 능력은 곧바로 인정을 받아 한 달 만에 하사관이 되었고 바크선(Bark船, 범선)의 선장이 됐다. 이후 약 10여 년 동안 영국 해협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등지에서 지도 측량을 하면서 지도 제작법을 배운 것이 그로 하여금 과학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는 단초가 됐다.

■ 세 차례에 걸친 항해

쿡은 세 번에 걸쳐 중요한 탐험을 수행했다. 1차 항해는 막강한 권위를 갖고 있던 영국왕립학회와 영국해군본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타히티로의 금성 관측 탐사대 파견이다. 1769년에 금성이 태양면을 통과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서로 멀리 떨어진 데서 관측하면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를 정확히 잴 수 있다고 생각한 영국 정부가 탐험대를 구성한 것이다.

이 탐험대는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는데 과학을 위한 탐험대 파견으로는 최초이기 때문이다. 해군 본부는 이 일을 맡을 인물로 하사관 쿡을 추천했다. 쿡은 뛰어난 항해술뿐만 아니라 측량과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으므로 쿡을 대위로 승진시킨 후 탐사 대장으로 지명한 것이다.

1768년 8월, 쿡의 제1차 탐험대는 엔데버 호(Endeavor, 368톤)에 94명의 일행을 태우고 플리머스항을 출항했는데 일행 중에는 동·식물학자, 사생화가들도 포함됐다. 1769년 타히티섬에 도착한 탐험대는 관측소를 설치한 후 이어서 비밀리에 내려진 ‘미지의 남방 대륙‘ 존재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항해에 들어갔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양 극에 두 개의 주요한 대륙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구가 자전할 때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면 북반구의 유라시아 대륙처럼 거대한 땅덩어리가 남반구에도 있어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남방 대륙을 탐색했지만 이들이 발견되지 않아 쿡에게 이를 탐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쿡은 이 항해에서 뉴질랜드가 2개의 섬으로 나뉜 것을 발견했고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탐사한 후 문명인이 살 수 있는 땅임을 확인했다. 그는 이 대륙의 동쪽 땅을 뉴사우스웨일스라고 명명한 뒤 영국 땅임을 선언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는 그가 찾던 남방 대륙은 아니었다.

쿡은 1차 탐험에서 30명이나 되는 선원을 잃는 악전고투 끝에 1771년 7월 영국 도버에 귀환했다.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항해 답사기를 제출했는데, 꼼꼼하고도 철저한 항해 보고서는 당대의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노고는 곧바로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그의 이런 파격적인 승진은 쿡의 정밀한 항해 기록으로 태평양 지역이 세계 지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쿡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채집한 갖가지 동식물 표본은 박물학(생물학)에 크게 이바지했고 그가 데려 온 캥거루는 유럽인들의 미지에 대한 관심을 끌게 했다. 쿡은 단순한 선박의 함장이 아니라 완벽한 과학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1차 항해에서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는 데 실패하자 영국 정부는 계속 미지의 남방 대륙을 탐사하도록 2척의 배를 배정했다. 1772년 7월, 1차 탐험 때보다 훨씬 좋은 과학 장비를 싣고 영국을 출발했다. 승선 인원은 총 200여 명으로 선원뿐만 아니라 천문학자 등 과학자들도 포함됐다.

■ 대항해 시대와 괴혈병

2차 항해는 쿡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것은 당대의 항해에서 고질병이었던 괴혈병을 치료하는 선구자가 됐기 때문이다. 15세기 들어 대형 선박으로 원(遠)거리 항해가 가능해지자, 오랜 항해 동안 저장 음식에 의존하자 괴혈병이 생기기 다반사였다. 괴혈병의 증상은 매우 고약스러워서 몸이 피곤해지고 허약해지며 팔다리가 붓고 잇몸에서 피가 난다. 좀 더 진행되면 폐와 신장까지 문제가 생겨 사망에 이른다.

쿡도 처음부터 괴혈병 치료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원들의 괴혈병을 처음 접한 것은 1758년인데 괴혈병이 가져오는 참상에 놀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기간 항해를 하다 보면 당연하게 괴혈병이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 역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임스 쿡이 부여받은 임무는 항해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선원들의 건강이 담보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부여된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쿡은 선원들의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선원들에게 공급했다. 만약 항해 중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떨어지면 절인 양배추를 보급했다. 그리고 쿡은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제일 먼저 신선한 식료품부터 챙겼다. 그의 식단에 결론적으로 비타민C가 공급되어 괴혈병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이른바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셈이다.

처음에는 선원들이 그가 제공하는 식단에 불만을 터트렸으나 그가 지휘하는 함선 내에서는 괴혈병이 발병되지 않자 그의 식단은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많은 선단들이 그의 식단을 기본으로 채택했다. 놀랍게도 그의 식단은 고질적인 괴혈병을 거짓말같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를 궁극적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과학자로 인식하는 이유다. 쿡의 조치는 결론적으로 비타민C, 즉 아스코르브산을 먹도록 한 것이다.

■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아서

쿡은 2차 탐험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남극 대륙의 75마일 지점까지 접근하였는데, 당대로서는 대단한 항해 기록으로 평가된다. 그때까지 남극해는 그 누구도 항해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바다였다. 쿡은 이곳에서 처음 빙산을 보았고 이어서 남극까지 얼음으로 대륙이 덮혔다는 것을 발견했다. 쿡에 의해 ‘미지의 남방 대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2차 항해에서 쿡은 미스터리로 잘 알려진 남태평양 상의 이스터섬에서 유명한 ‘모아이’를 발견하기도 했다.

2차 항해는 쿡에게 큰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영국왕립학회는 평민인 그를 특별히 회원으로 선출했고, 항해 중 괴혈병 희생자를 내지 않은 공적으로 왕립학회의 최고 영예인 코플리(Copley) 메달을 수여받았다. 쿡이 왕립학회로부터 이와 같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괴혈병 방지 노력 외에도 항해 역사상 특별한 업적 때문이다. 당시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는데 쿡은 크로노미터(chronometer)를 이용해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해 냈다.

■ 3차 탐사에 나서다

쿡에게 주어진 3차 탐사의 목적은 북서항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 열강은 북극해를 지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북서항로를 경쟁적으로 찾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가 이번에도 경험 많은 쿡을 탐사 대장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제임스 쿡은 2차 항해에서 사용했던 2대의 함선에 200여 명의 선원과 과학자들을 태우고 출항했다.

1778년 1월, 쿡 일행은 북쪽으로 항해를 시작해 유명한 크리스마스 섬은 물론 유럽인 최초로 샌드위치 제도(지금의 하와이)를 발견했다. 그들 일행이 하와이에 상륙했을 때 예상외로 원주민들은 낯선 방문객들을 호의적으로 맞아주었다. 그들이 하와이 원주민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것은 풍요의 신 로노(Lono)가 하얀 돛을 단 카누를 타고 온다는 하와이의 전설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쿡의 선단은 하와이를 출발해 다시 북상하여 북서항로를 발견하려 했지만 태풍 때문에 하와이로 기수를 돌렸다. 이것이 쿡의 마지막이 됐다. 하와이로 항로를 잡은 것은 바로 전 해에 원주민들이 그들을 성대한 의식에 초대하는 등 환대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시 쿡의 일행, 즉 부하들이 하와이 원주민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원들은 만취하여 서로 싸움을 하고, 잘못된 우월감을 가지거나 원주민 여성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일쑤였지만 큰 말썽 없이 하와이를 출발하여 탐험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태풍을 피해 다시 하와이로 들어왔을 땐 과거에 쿡의 부하들이 저지른 행동에 원주민들이 분개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원주민들은 그들 선박에 있는 쇠붙이들을 빼냈다. 어느 날 배에 딸린 소형 보트까지 사라지자 쿡은 대원 10명과 함께 상륙해서 추장을 붙잡아 원주민들이 훔쳐간 배와 물건을 돌려주기 전에는 추장을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이 쿡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다. 성난 원주민 수천 명이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오자 쿡 일행은 상륙선 10m 앞까지 달아났지만 쿡은 원주민들에게 결국 살해됐다.

그는 위대한 항해가, 탐험가, 지도 제작자이자 뛰어난 리더십, 불굴의 용기, 탁월한 항해술,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쿡이 빈농의 아들이라는 낮은 지위였음에도 당대의 유능한 항해가로, 또 과학자로 떠오른 것은 항해에 과학적인 바탕을 세우고 제도법과 항해술에 과감하게 새로운 기준들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하층민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노력과 실력만으로 사회적 높은 지위를 성취한 의지의 사나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는 당대의 다른 탐험가들이 기독교를 모토로 대부분 비인도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인도주의적인 교양을 심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다른 문화의 정복자나 파괴자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리 정치학적 과제를 수행했다고 하지만 그 목적은 영국의 해상 패권 장악을 위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를 보는 시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선장이었던 제임스 쿡은 과학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과학적 탐구 조사 중 맞은 영웅적 죽음, 즉 ‘과학의 순교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고한 영국 해군이 비로소 쿡의 희생으로 인해, 그의 행동들은 괴혈병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그가 주장한 식단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항해에 과학적인 바탕을 세우고, 괴혈병을 사라지게 만든 원동력이 된 제임스 쿡은 과학적 인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글 :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과학저술가

※ 참고문헌
『탐험과 발견』, 이병철, 아카데미서적, 1989
『탐험사 100장면』, 이병철, 가람기획, 1997
『이타적 과학자』, 프란츠 M. 부에티츠, 서해문집, 2004
「제임스 쿡」, 표정훈, 네이버캐스트, 2009.04.29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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