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14쪽
올 여름의 인생 공부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뚝뚝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 그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셨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28쪽
삼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30쪽
시인 이성복에게
현기증 꼭대기에서 어질머리 춤추누나, 아름다운 꼽추 찬란한 맹인. 환상이 네 눈을 갉아먹었다. 현실이 네 눈에 개눈을 박았다. (그래서 네겐 바람의 빛깔도 보이지)
가장 낮은 들판을 장난질하며 흐르는 물, 물의 난장이 가장 높은 산맥을 뛰어넘는 키 큰 바람, 바람의 거인
행복이 없어 행복한 너 절망이 모자라 절망하는 너 무엇이나 되고 싶은 너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은 너
영원히 펄럭이고저! 눈알도 아니 달고 척추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 바다의 날개...... 하늘의 지느러미......)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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