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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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14쪽

올 여름의 인생 공부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뚝뚝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
그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셨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28쪽

삼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30쪽

시인 이성복에게

현기증 꼭대기에서 어질머리 춤추누나,
아름다운 꼽추 찬란한 맹인.
환상이 네 눈을 갉아먹었다.
현실이 네 눈에 개눈을 박았다.
(그래서 네겐 바람의 빛깔도 보이지)

가장 낮은 들판을 장난질하며
흐르는 물, 물의 난장이
가장 높은 산맥을 뛰어넘는
키 큰 바람, 바람의 거인

행복이 없어 행복한 너
절망이 모자라 절망하는 너
무엇이나 되고 싶은 너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은 너

영원히 펄럭이고저!
눈알도 아니 달고
척추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
바다의 날개......
하늘의 지느러미......)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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