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부의 서재 - 어느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
임호부 지음 / 산과글 / 2013년 9월
절판


이런 구조에서는 골목 끝 고루거각에 사는 부자 나리가 같은 골목 안에서 굶주리는 이웃에 자선을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대의식이었다. (서울은 깊다, 57쪽)
-28쪽

어디 골목뿐이겠는가. 마당도 그랬다. 마당을 중심으로 대청마루 딸린 안방에는 주인이 살고 나머지 방들에는 세입자들이 살며 일상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주인집에 잔치가 있을 때는 일손을 돕는 대신 잔치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고, 급전이 필요할 때는 주인집이 세입자들의 은행 노릇을 했다. 주인집의 티브이와 전화는 거의 공용이다시피 했음은 물론이다(그 대가로 주인집 아이에게 늘 져줘야 했지만). 빈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부자들에게는 베푸는 삶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그 골목과 마당에서 자랐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제 그런 골목과 마당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아파트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모여 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도 주공이니 임대니 하며 차별의식을 조장한다고 하니, 옛날 부자들이 권위의식과 함께 책임의식 또한 부여받았던 것에 비해 요즘 부자들에게는 풍요로울 부(富)자를 붙여주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부자와 빈자가 모여 살 때보다 따로따로 군락을 이루며 살 때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돼 보인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2009.8.2.)-29쪽

어머니 간병 때문에 병원에 있을 때, 같은 병실에서 구순의 노모를 간병하던 일흔 가까이 되어 보이는 아들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이 아흔이나 돼서 병원에 누워 남의 손에 의탁하고 있으려니까 사는 게 참 치사하다. 그치, 엄마?" 치사하다는 말의 의미를 나는 그때 알았다. 마흔이든 아흔이든 삶은 단지 육체적 견딤만으로는 의미를 얻지 못한다. 말이 그 견딤을 정당화해줘야 한다. 이를테면 "아들을 봐서라도 좀 더 사셔야 할 텐데......"가 될 수도 있고, "아흔이면 이제 돌아가시는 게 당신을 위해서나 가족들을 위해서나 좋을 텐데......"가 될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육체가 버텨주는 것만으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 그리고 그 의미가 버텨주어야 한다. 따라서 "넌 도대체 사는 의미가 뭐야?"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참으로 치사한 일이나. 아니 때로, 사는 것 자체가 참으로 치사한 일이다. (2009.8.13.)
-32쪽

거리엔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거리를 지나는 차량들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건물도 느긋하게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내가 외국의 소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일요일이었다.
담배를 천천히 피웠다. 담배를 급하게 피우는 것이 죄가 될 것만 같은 도시의 저녁이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 역사로 들어서는데, 전철이 이곳을 출발하면 나를 곧장 낯선 도시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 월요일이라는 이름의 도시. 역사 중간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계를 보고 역사 바깥의 광장을 보고 다시 시계를 보았다. 역사를 나가 횡단보도를 건넜다. 건너편 대각선 방향에 환하게 불을 밝힌 중국집이 보였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나는 짬뽕을 시켜 천천히 먹었다. 아직은, 일요일이었다. (2012.1.16.)-245쪽

부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의 삶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처럼 허방과 마주할 때마다 부사는 마치 누군가가 던져준 징검돌처럼 우리의 바닥을 든든히 받쳐준다. 힘차게, 안전하게 혹은 짜릿하게. 그중에서도 삶의 허방을 채워주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삶 그 자체를 규정해줄 만큼 중요한 부사도 있다. 그 자체로 징검다리인 부사. 접속부사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이야기는 접속부사로 이어진다. 드러내든 감추든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같은 접속부사 없이는 어떤 이야기도 이어질 수 없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달라서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만으로는 안전하게 다음 돌로 건너갈 수 없다. 삶이 필요로 하는 접속부사는 ‘그런데’가 아니라 ‘그런데도 불구하고’이다. 누구나 ‘불구하고’의 힘으로 사는 것이지, ‘그런데’가 안내하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아니니까. 반명 이야기는 ‘불구하고’를 거부한다. 아니, ‘불구하고’를 포용할 수 없다. 누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며, 어떤 이야기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247쪽

오직 삶만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어질 뿐이다. 이야기와 삶의 이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학은 그저 삶의 이야기에 불과해진다. 이른바 ‘핍진성’에 매몰되어 척박한 리얼리즘에 머물고 마는 것.
이야기와 삶은 다르다. 둘 사이에는 ‘그런데’와 ‘그런데도 불구하고’가 드러내는 것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로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희망이 없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로 이어지는 삶에는 희망이 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야기는 그저 헤겔이 말한 ‘악무한’처럼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지만, 삶은 그런 식으로 이어질 수 없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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