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적인 책사로 정도전과 한명회가 흔히 꼽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한명회는 기껏해야 수양대군을 용상에 앉히는 데만 집중했다. 그에게는 제도와 사상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반면에 정도전은 법, 제도,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 등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새 세상의 전망과 방안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혁명과 건국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와 대등하게 이마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다. 이성계는 단 한 번도 정도전을 책사 취급한 적이 없다. 『맹자』를 탐독하고 유배라는 하방을 거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만난 문신과 숙련된 기병을 거느리고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의 기이한 우정은 멋지고 그윽하다. 대장부답다. -7쪽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바다.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세월은- 아직 오지 않은 세월. 그대에게 내 말하고 싶은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말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말. -『옥중서한 제19신』-나짐 히크메트가 쓰고 백석이 번역하다.-13쪽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나라도 새로워지지 않는다. 사람이 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사람의 이치와 느낌을 분명히 남기는 것이, 미완일지언정 지금 꼭 필요하다. 스스로 잊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자서(自序)를 지어 붙이곤 여명에 질문을 던진다. 정도전, 너란 인간은 6년 전 높고 고운 나라(高麗)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가? -19쪽
"여기 큰 집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당우(堂宇) 그러니까 지붕은 왕이고 동량(棟樑) 그러니까 용마루와 들보는 정승이며 기초는 백성에 빗댈 수 있습니다. 기초는 마땅히 단단하고 두터워야 하고 동량은 마땅히 편안하고 우뚝 솟아야 하니, 그다음에야 당우가 튼튼할 겁니다. 동량은 위로는 지붕을 받들고 아래로는 기초에 의지하여 서니, 재상이 왕을 받들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과 흡사합니다. 일찍이 상나라의 명재상 이윤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하는 위로는 덕을 펴고 아래로는 백성을 가르친다.’" -55쪽
누구에게는 날갯짓 한 번에 깨는 악몽이 누구에게는 헤어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출세욕이며 찬탈이다. -58쪽
나라를 위해서라거나 사직을 위해서라고 답했다면 실망했으리라. 그러나 대장군은 평생 거창한 명분보다 이웃의 행복을 소중히 여겼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포은이나 나의 입장과, 이르는 경로는 달랐지만 종착지는 놀랍도록 똑같았다. -76쪽
욕심은 열정이다. 욕심 없이 대의를 도모하긴 어렵다.-82쪽
물은 웅덩이를 모두 채운 후에야 다음 개천으로 흘러내려 간다. 이방원은 아직 더 차올라야 한다. 더 아파야 하고 더 외로워야 한다. 낮의 질주보다 밤의 침잠을 배워야 한다. -83쪽
변방의 이름 없는 장수였던 이성계를 중앙의 문무 대신들에게 적극 추천하여 중용하도록 이끈 이가 누군가? 포은일세. 포은의 이토록 놀라운 추진력과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변화에 대한 갈망을 무시한 채 ‘고려에 충성을 다하려는 신하’로 묶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는 나보다도 더 깊이 절망했고 나보다도 더 뜨겁게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네. 다만 사전 혁파를 목소리 높여 반대한 한산부원군과 사제지간인 탓에 주장을 펴는 데 말을 아꼈고, 또 금상이 스승의 예로 포은을 대하니 그들이 돈독해 보일 뿐일세. 포은을 베겠다는 것은 곧 나를 베겠다는 것과 같아. -87쪽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 -192쪽
"수문하시중께선 늘 이런 식이라오. 정말 우릴 말릴 생각이셨다면 문을 열고 나와서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오. 한데 병을 핑계로 자리를 피한 것은, 그 침묵에는 최소한 우리가 어찌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뜻이 담긴 게요. 최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도 아니니 걱정들 마시오. 우리가 계속 뜻을 굽히지 않으면 시중께서도 못 이기는 척 우리 편에 서실 것이오." -220쪽
멀리서 포은을 대한 이들은 넉넉하고 과묵한 인품에 반하여 독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포은이 정말 일개 서생에 불과했다면, 권력에의 의지가 없었다면, 공민왕, 신우, 신창을 거쳐 금상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하였겠는가. 그는 언제나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우두머리를 놓치지 않았다. 착한 마음으로 어찌 으뜸을 얻고 유지하겠는가. -230쪽
명나라가 중원의 최강자로 들어섰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 명나라를 공격하려고까지 하였다네. 명나라는 당연히 의심을 품고 있어. 그런 명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선, 왕실에서 원나라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울 필요가 있네. 신돈의 씨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아. 공민왕이 신우를 아들로 인정하여 세자로 삼았고 신창이 아버지인 신우에 이어 왕위에 올랐네.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계속 원나라의 입김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이를 확실히 잘라 내기 위해, 원나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방계 왕족 중에서 금상을 고른 거야. 자, 이제 고려는 확실히 원나라와 정리를 했습니다, 라고 보여 준 게지. 그리고 세자의 입조는 이를 증명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네. 신우와 신창을 내리고 세자를 명나라에 입조하도록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이가 누구인가. 바로 포은이라네. -232쪽
암살에 성공하더라도 대장군이 쌓은 따듯함과 너그러움의 탑은 일시에 무너지고 마네. 광폭함을 숨겼다는 누명을 쓰게 될 걸세. 포은의 목은 얻겠으나 천하를 한순간에 잃게 돼. -236쪽
왕도 사람이다. 어진 이도 있고 각박한 이도 있으며 똑똑한 이도 있고 멍청한 이도 있으며 유약한 이도 있고 강건한 이도 있다. 왕이 전권을 휘두른다면 혼군(昏君) 혹은 폭군의 도래는 시간문제다. 왕은 신하를 두려워해야 하고 신하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움은 힘에서 나오고 그 힘은 법과 제도를 통해 뒷받침된다. 내 구상의 핵심은 왕을 예외로 두지 않는 것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지만 전체를 뒤바꾸지는 못하는 체계 속 일원이다. 이렇게 짜 둬야 왕이 설령 삼강과 오륜을 무시하더라도 체계 속에서 고쳐 나갈 수 있다. -239쪽
인류는 현재의 화두로 과거를 끊임없이 재구축해 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과거이기에, 과거를 고찰하는 것은 곧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도약하는 방편이다. -266쪽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일찍이 강조했다.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이다." 이제 조선에 새겨진 우리의 미래를 찾아 들어가려 한다. 서두르지 않고 황소걸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최선을 다하겠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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