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장바구니담기


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9쪽

나는 오직 살인만 생각했다.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다시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그때는 DNA 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쇄살인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다. 수십 명의 거동수상자와 정신병자가 용의자로 지모고대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몇몇은 허위 자백까지 했다. 경찰서들끼리는 서로 협조를 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경찰 수천 명이 작대기를 들고 애먼 야산만 쑤시고 다녔다. 그게 수사였다.

좋은 시절이었다.-32쪽

며칠 후 내 시가 실린 지방 문예지 200부가 집으로 배달돼왔다. 등단을 축하한다는 카드도 동봉돼 있었다. 한 부만 남기고 199부는 땔감으로 썼다. 잘 탔다. 시로 데운 구들이 따뜻했다.
어쨌든 나는 그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38쪽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42쪽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52쪽

“고아원 원장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죽었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엄마는 그럼 지금 어디 계실까요?”
“모르지. 어쩌면 아주 가까운 데 있을지도.”
예를 들면 우리 집 마당이라든가.-103쪽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115쪽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mr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14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