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출산을 했다. 예정일을 일주일 넘기고도 도무지 아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아 유도 분만을 두차례 진행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결국 제왕절개를 했다. 일주일 가량 지나고 나서 산후조리원으로 옮겼고, 바로 어제 그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다현 양은 겨울 방학 내내 아팠다. 장염으로 연말에 고생을 했는데, 그후로도 비염으로 인한 감기로 병원 신세를 계속 졌다. 며칠 전에도 설사가 멎질 않아서 병원 예약을 했는데 간호사가 날짜를 잘못 기록하는 바람에 어제 진료가 오늘로 밀려 있었다. 덕분에 언니는 당일 예약을 하기 위해서 일단 병원으로 출발했고, 학교 다녀온 다현이를 데리러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래저래 시간을 많이 잡아 먹으니 친구의 병실로 가기 전에 조카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다현양을 데리고 버스 정류장에 섰는데, 아뿔싸!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네. 조카를 남겨두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서 휴대폰을 챙겼다. 이렇게 맘 급할 때에 부츠는 얼마나 불편한 신발인가! 나오면서도 뒷덜미가 약간 불편한 것이 뭔가 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았고 조카가 기다리니 다시 부랴부랴 나와서 버스를 탔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생각났다. 친구 아기 선물과 친구 생일 선물을 몽땅 집에 두고 왔다. 


-다현아, 몇 정거장만 더 가면 엄마가 이 버스에 탈 건데, 다현이 그때까지 혼자 있을 수 있니?

-아니!


음... 그렇구나. 결국 언니가 버스에 타는 걸 확인하고서 내렸다. 그리고 되돌아 가서 선물을 들고 다시 친구의 병실로 고고씽. 아, 용인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멀었던가. 4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힘들어...;;;;;


신생아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곳 창 너머로 친구는 자기 아기가 누구인지 맞춰보라고 한다. 하하핫, 맞춰볼까 했지만 친구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어서 본의아니게 컨닝을 한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기는 딱 봐도 아빠를 닮아 있었다. 신기해라. 이 놀라운 유전의 법칙!


생김새와 체질, 식성과 성격... 많은 것들이 닮아 간다. 나를 닮은 내 자식을 보는 것은 신비롭고 경이롭기까지 하겠지만, 때로 그 사실이 끔찍할 때도 있다. 엄마 팔자를 닮아가는 딸자식이라든가, 그토록 닮고 싶지 않은 제 아비를 닮아가는 아들이라면...


소설가 박부길은 끔찍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비를 몰랐고, 어미는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집을 떠났다. 아이는 큰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큰아버지의 집에는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금역이 있었다. 그곳에 미치광이 사내가 결박된 채 있었다. 아이에게 손톱깎이 좀 갖다달라고 사정사정을 했던 사나이. 그 한번의 친절이 가져온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박부길의 삶 전체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 원죄가 거기서 잉태했다. 그리고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 아버지의 길을 되밟았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할 때 아내 예씨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태어날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주몽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라면, 그리하여서 장차 아버지를 찾을 때에 얼굴도 모르는 그들 부자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식 하나를 남기고 길을 떠났다. 이십 년 뒤 아들 유리는 아버지가 남긴 증표를 들고서 고구려로 찾아왔다. 주몽은 아들을 인정했고, 그 아들이 대를 이어 고구려의 2대 임금이 되었다. 아버지의 새 부인 소서노와 그녀의 자녀들은 유리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그녀가 자리를 다툼하지 않고 남쪽으로 떠난 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왕이 된 유리는 자기 세력이 없었다. 나라 밖에는 큰 나라들이 호시탐탐 신생국 고구려를 노렸고,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 역시 이웃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아버지를 모시던 신하들은 온전히 자기를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 어려서 아비 없이 자라며 겪었던 서러움, 강자 앞에 몸을 낮추고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던 긴 시간들이 그에게 드리웠을 트라우마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 기억이 그를 모진 아비로 만들었다. 해명태자는 강대국 앞에서 당당했다는 이유로 아비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았다. 형님이 죽고 어린 동생이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어린 임금이 되었다. 어린 임금 무휼은 아버지와 다른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강한 군주가 되었고, 그리하여 그의 이름에는 '대무신왕'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하지만 강한 군주는 아들이 원한 따뜻한 아버지와 공존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사랑에 울고 아파했지만 나라를 움직이는 정략적 판단 앞에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놓았다. 그것이 호동왕자다. 무휼의 아비 유리왕은 힘 없는 나라를 핑계로 자식을 잡았지만, 무휼은 강한 나라를 핑계로 자식을 잡았다. 그가 가장 닮고 싶지 않아 했던 아버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김진 작가는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대조적으로 잘 표현했다. 아버지 무휼이 찾으려는 '부도'는 눈에 보이는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아들 호동이 찾고자 했던 '부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향이었다. 피흘리는 아버지의 세상이 아닌 평화롭고 따뜻한 세상. 그걸 뮤지컬은 또 극적으로 표현해 냈다.



"저 부도로" -김법래, 고영빈, 조정석, 고미경


무휼 narr) 

무엇을 버렸느냐 네 손으로
너의 무엇을 버렸느냐
왕 될 자의 표식
왕 될 자의 신수

무휼  vocal) 

보아라 이 땅의 눈물을
들어라 바람의 소리를
이 땅을 지키려했던 염원들
그 피눈물을 닦아라

무휼 narr) 

약한 자는 왕위에 올릴 수 없다. 네가 네 스스로 신수를 버렸을 때, 이미 그렇게 결정 된거다

무휼 vocal) 

가리라 원한을 풀으러
가거라 이 칼을 들고서
잃었던 우리의 땅을 찾아라
그 붉은 땅을 향해서 달려라

호동 vocal) 

눈물없이도 이별없이도
사랑하는 세상은
정녕 없는 걸까
나의 부도는
하늘 나무 위
피 흘리지 않아도
평화로운 세상

그런 세상 원하는데

무휼 narr)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세계를 넘어
더 커지는 것
세상의 모든 왕들은
앞선 왕의 세계를 넘어
더 커지는 것

왕이 되고프면 목숨을 걸어라

무휼 vocal) 

따르라 태자의 운명을
가거라 저 피묻은 길
주어진 너의 운명 저버리면
네 목숨마저 위험해지리니

호동 vocal)

무얼 원하나 나의 아버지

당신 품은 사랑이 바로 이런 건가
나는 꿈꿨지 하늘 부도를
당신 손을 잡고서 함께 가길
나는 누군가 무얼 꿈꿨나
왕의 자리였던가
하늘 부도인가
나는 가리라 나의 뜻으로
당신 손을 놓고서
푸른 하늘길로
푸른 하늘 저 부도로
푸른 하늘 저 부도로









아들과 불화한 아버지를 찾기는 쉬울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싶고... 

아버지와 닮을 뻔한 인생을 제대로 수정한 사람도 분명히 있다. 솔로몬의 위증에서 변호인을 맡았던 간바라 가즈히코가 그랬다. 


제 아버지는-가즈히코가 목소리를 낮췄다.
“알코올중독으로 이성을 잃었고, 그 결과 어머니에게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고 나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실은 정식으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나약했던 아버지는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가 저지른 행동을 견뎌내지 못했어요. 그래도 자기 책임을 제삼자에게 덮어씌우지는 않았습니다. 나약했지만, 그렇게까지 비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죗값을 치렀던 겁니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가즈히코는 말했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면. 더 늦기 전에.” -599쪽


늦기 전에 멈출 수 있었다면 그건 분명 용기를 낸 것이다. 그것이 양심이건, 예의이건, 혹은 순정이건.









책 이야기를 즐겁게 했다. 손난로는 따뜻했고 카드는 귀여웠다. 문앞에 붙여진 메모는 나름 낭만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여기까지다. 

덕분에 가졌다던 용기, 혹은 자신감이 나를 꼭 전리품처럼 느끼게 했다. 

그럴 의도 없었다고 믿지만, 나는 속상하고, 또 아프다.


모진 말을 쓰려고 했는데, 애써 지워냈다. 최소한의 예의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시간만한 명약이 없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처음엔 황당함이었다가,  한동안 노여움이었다가, 그러다가 해프닝이 되고, 언젠가 이것도 하나의 기억이라고 담담해진다면 좋겠다. 


좋은 책에 대한 내 작은 보답은 "유정정애"의 한 구절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것은 무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무죄
그렇지만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유죄
내 왕의 적을 믿는 것도 명백한 유죄
하지만 내 왕이 이미 마음 뺏긴 사람이니 우리는 공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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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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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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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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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7: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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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3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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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3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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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3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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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4-02-13 13:40   좋아요 0 | URL
잘 하셨어요. 절판이나 품절 마크 뜨면 꼭 뒤늦게 후회하게 되더라구요.^^
오늘 따뜻한 하루 보내셔요!!

2014-02-14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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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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