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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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추락사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했고, 학생의 부모도 동의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고발장이 날아왔다. 죽은 학생은 이 학교의 문제아 3인방에 의해서 죽게 된, 즉 타살이라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고발장의 진실성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을 충분한 근거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발장이 은폐되었고, 그것이 학교의 부정적인 면만 낱낱이 파헤쳐온 방송 기자의 손에 넘어가면서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학생이 불우하게도 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재판을 열기로 결심했다. 고교 입시를 앞두고 있는 중요한 여름방학이었지만, 이 재판을 졸업 과제로 명명하고 변호인과 검사 측으로 나뉘어서 증인을 찾으며 사건을 파고 들었다. 그리고 이제 대망의 재판이 열린 것이다. 3권은 재판 첫째 날부터 시작한다. 


참 흥미로운 전개였다. 이미 1권에서 사망한 학생이 자살이라는 걸 충분히 설명했다. 고발장을 쓴 학생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미리 밝혔다. 그렇지만 2권에서 등장한 다른 학교 학생이 변호인을 맡으면서, 또 그 아이가 이 사건에 중요한 핵심을 쥐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하면서 이미 답안지가 나온 문제를 여전히 흥미롭게 바라보게 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놀라운 필력이다. 


이 아이들에게 이 재판이 왜 중요한지를 이 긴 이야기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했다. 사실 어른들에게도 이 재판은 필요했다. 학교의 선생님, 학부모들, 방송 관계자들과 경찰서 관계자들까지... 처음에 이 재판을 찬성했건 그렇지 않건 상관 없이 모두에게 이 재판은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재판은 전혀 어수룩하지도 않았다. 실제 재판과는 분명 차이가 있고, 실제 재판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이 재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이데 슌지 같은 망나니도 달라질 수 있는 변곡점을 만들어 주었고, 아이의 죽음으로 힘들어 하는 학부모들에게 이해와 공감의 장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제불능인 인물도 당연히 등장했다. 모기 에쓰오 기자가 그랬다. 그의 잘난척하는 얼굴에 제대로 한방 먹여준 간바라 변호인의 기지와 지혜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런 순발력은 없어도 학생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진실성을 보여준 쓰자키 전 교장도 마찬가지였다. 목표가 아무리 훌륭해도 방법과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면 목표의 순수성마저도 의심 받게 된다. 모기 기자도 이 재판에서 부디 얻고 가는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은총이 모두에게 똑같이 베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모두 똑같은 '어른'은 아닌 것이다. 


단지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그에 걸맞는 책임감이 따라오고 성장이 필요하다. 2권에서 아이 어른과 어른 아이가 나왔는데, 여러 학부모들과 어른들을 통해서 그걸 확인하게 된다. 사사키 형사가 이 재판에서 어른들은 완패했다고 인정하는 것에 동의한다. 당신들은 하지 못하는 걸 이 아이들이 해냈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조금은 다른 어른으로 커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기다려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졌지만 진 게 아니다. 후지노 검사가 졌지만 이 재판에서 진정한 패자는 없는 것처럼.


재판은 엿새에 걸쳐서 다섯 차례 진행되었다. 중간에 휴정을 하루 했기 때문이다. 열다섯 밖에 먹지 않은 학생들이 진행하는 재판인데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은 어찌나 치열하고 불꽃이 튀던지, 너무 훌륭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고 해도 이 아이들이 아직은 중학생이라는 걸 자꾸 상기하기 때문이다. 재판에 방청인으로 참석했던 사람들, 증인으로 출두했던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이 진행하는 재판이기 때문에 평소의 포지션으로 접근했었다. 반말도 예사였고, 판사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법정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재판이 모두 끝나고, 배심원들의 평결이 떨어질 때, 재판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몸가짐은 달라 있었다. 숙연해졌다고 할까. 그렇게 진심을 다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뜨거웠다. 


간바라 가즈히코. 이 재판의 변호인이면서 유일하게 외부 학교 출신인 아이. 그러나 사건에는 가장 깊이 관여해 있던 그 아이가 못 견디게 안쓰러웠다. 이미 2권에서 등장한 아이의 친부모에 관한 이야기. 그 엄청난 트라우마를 등에 지고 이렇게 잘 자라준 아이가 대견하고 그런 만큼 더 안타까웠다.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아이가 겪었을 마음고생과 성장통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떨쳐낼 수 있게 양부모님이 만들어준 따뜻한 울타리가 감사해서 독자인 내가 두 손 꽉 잡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끌어내 준 노다 겐이치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1권을 읽으면서부터 단 한명의 주인공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이 캐릭터를 선택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여러 화자가 나오고 매 장이 시작될 때마다 각기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서술했지만, 마지막엔 결국 노다 겐이치로 끝내지 않을까 싶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온 그 눈. 살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깨달았던 아이. 그래서 공포와 분노와는 질적으로 다른 살의를 구분할 수 있던 이 아이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의를 정당한 자기방위라고 말했다. 아무 법적 효력이 없는 그 선언이 구원처럼 들렸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한 사람의 팔을 잡아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참으로 고마웠다. 겐이치 역시 가즈히코처럼 참으로 잘 자라주었다. 잘 견뎌 주었고 잘 이겨냈다. 이렇게 어려운 고개를 넘어간 사람은 다시 그 고개를 넘으려는 사람에게 손을 뻗어주고 타는 목에 물한잔도 건넬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생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제 안의 독을 공동우물에 풀어서 다 함께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도 존재한다. 가시와기가 그랬다. 


제 목숨을 담보로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그의 표면적 죽음은 자살이지만, 그 스스로 집행한 타살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이 재판의 진정한 피고인은 오이데 슌지가 아니라 가시와기 다쿠야다. 재판을 끝내고 난 뒤 그의 부모님의 모습은 측은했다.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래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큰 아들의 상처도 돌아봤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특별하다고 느꼈던 아들의 성격과 특징은 다른 사람에겐 독이었다. 해독제도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 심지어 소시오패스를 연상시킬만큼 무섭기까지 했다. 더 많은 희생이, 상처가 퍼질 수 있었는데도 아이들의 용기와 지혜가, 그리고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이 자체 백신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이 보태고 보태어져서 가능했다.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등장한 오이데 슌지는, 가시와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죄이지만, 그 밖의 무수한 사건들에 있어서는 명백한 유죄였다. 그걸 묻어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 재판으로 한걸음을 어렵게 떼낸 그라면, 그 속의 아이 어른도 이제 껍질을 깨고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아버지와는 다른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 첫걸음은 마스이 노조무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게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미야케 주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가키우치 미나에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니, 유령으로 살지 않을 방법도 자신의 힘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고, 너에게 온몸으로 사죄하는 이를 만났고, 그리하여 너 역시 네 모든 걸 걸고 지켜내고 싶었던 걸 경험했으니, 이 재판 전의 미야케 주리와 재판 후의 미야케 주리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의심치 않는다. 네가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사이 마쓰코에 대한 참회라는 것도 영리한 너는 분명히 알아차릴 테지.


가시와기 다쿠야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었다. 그는 세상 속에 섞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왕따시켰다. 그가 지적한 부조리함과 유치함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잣대로 모든 걸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려 드는 오만함을 보였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답이라고 단정했고, 자신이 바로잡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했다. 마치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하찮은 인간들을 심판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죽어야 했다. 그 누군가에는 다쿠야 본인도 포함된다. 모든 것이 시시하고 의미가 없다고 말했던 그는 자기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만 있는 지극한 에고이스트로 보인다. '나'만 있고 '남'은 없던 너의 작은 틀이 측은하다. 이런 아이마저도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창을 갖추지 못한 현실의 교육 시스템도 안타깝지만, 그런 문제 많은 학교도 결국 살아남은 아이들의 건강한 마음으로 바꿔나갔다. 그러니, 살아 있지 못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바뀐 것을 확인할 수도 없다. 살아서 견뎌내고 이겨내고 버텨내자. 그리고 바로 그 버틸 힘을 내기 위해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자. 외로운 옥상 난간 따위는 떠올리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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