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기생충 열전 -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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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에 비유한 것도 잘못됐다. 기생충은 언제나 먹을 만큼만 먹는다.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22쪽

2009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총 39구의 미라가 발견됐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미라는 쉬지 않고 발견되고 있다. 건조한 기후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운 기후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만들어진 비결은 뭘까? 답은 ‘회곽묘’에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양반들이 쓰기 시작한 회곽묘는 17~18세기에는 중·하류층에서도 널리 이용됐는데, 우리나라의 미라들은 100% 이 회곽묘에서 발견된다. 서울대 신동훈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회곽묘가 미라를 만드는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산소 차단. 나무로 된 관 주위에 회반죽을 부으면 산소가 차단되어 산소를 좋아하는 호기성 세균이 다 없어진다. 둘째, 열 발생. 산소가 차단돼도 혐기성 세균이 남아 있으니 시체가 부패할 수 있는데, 회반죽이 굳을 때 발생하는 열이 남은 세균들을 모조리 죽인다. 연구에 따르면 섭씨 100도 이상의 고열이 세 시간 이상 지속됐다고 하니, 이 정도면 어떤 세균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실제로 신 교수가 쥐를 죽여서 회곽묘에 넣어 봤더니 일반 관에 넣은 쥐와 달리 3년이 지나도 거의 썩지 않고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31쪽

미라가 나오는 회곽묘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를 좌우했던 명문가의 조상들. 그러다 보니 자기 가문의 조상이 미라가 됐으며 또 기생충까지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장 과정에서 발견되니 미라들 중 많은 수가 연구자 손을 거치지 못한 채 그냥 화장돼 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온 미라들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 유수의 외국 학술지에 실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반 가문들의 대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그 당시 사람들 중 기생충에 안 걸린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또 하나는 고고학자들과 의학연구자들의 공동 연구다. 발견된 미라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 그 시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기생충의 알을 많이 찾는다 해도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리라.
-37쪽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기생충학과가 의과대학에 먼저 생겼다는 거다. 기생충은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생물체가 기생충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어 길을 가는 쥐를 잡아서 조사해 보면 거의 대부분 기생충이 발견된다. 그 기생충들 중에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신기한 것들이 많고, 그중 일부는 사람에게도 감염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각 대학의 자연대마다 기생충학과가 있고 그 후에 의과대학에 생기는 게 맞고, 만약 그랬다면 기생충 연구의 저변도 지금보다는 넓었을 것 같다.
-43쪽

회충 알은 회충 암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변을 봤을 때 외계로 배출된다. 막 나온 회충 알은 사람에게 감염되지 않으므로 친구가 회충에 걸렸다고 해서 절교할 필요는 없다. 회충 알이 감염력을 가지려면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2~3주가량 숙성되어야 하며, 촉촉한 땅에서는 그 뒤에도 오래도록 살아 있으면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날만 기다린다.
-85쪽

정부에서는 양성자를 색출해 회충약을 먹였다. 수많은 회충들이 회충약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갔고, 그 바람에 대변으로 나오는 회충 알의 개수가 확 줄었다. 겨우 살아남은 회충들이 대변으로 알을 내보냈지만, 회충의 감염경로를 제대로 파악한 우리 정부는 "인분 비료 사용금지"라는 철퇴를 내린다. 이는 대변에서 잘 숙성된 알이 배추를 통해 사람 입으로 전달될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것으로, 회충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다. 게다가 변기가 점차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회충은 멸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0년대까지만 해도 50%를 넘던 회충 감염률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90년대에는 0.1%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한 사람 안에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던 시절은 갔고, 지금은 잘해야 한 마리가 고작인 세상이 됐다. 어두컴컴한 사람의 몸 안에서 자기 친구는 언제쯤 올까 궁금해하며 고독을 삼키는 회충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아프다.
-89쪽

편충은 영어로 ‘whipworm’이라고 부른다. ‘채찍 벌레’라는 뜻인데, 두꺼운 뒷부분이 손잡이 역할을 하고 가느다란 앞부분이 채찍의 때리는 부분에 해당된다. 편충의 슬픈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채찍 부분이 충체의 앞부분인데 사람들은 여기를 꼬리라고 생각해 ‘꼬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uris)’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느다란 앞 부분에 입도 있고 식도도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편충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는 걸 깨닫는다. 당황한 사람들은 뒤늦게 ‘머리가 채찍처럼 된 벌레(Trichocephalus)’라고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줬지만, 그전 이름에 익숙해진 학자들은 "그냥 쓰던 대로 쓰자. 편충이 서운해 봤자 지가 어쩌겠어?"라며 기존 학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시에서 보듯 제대로 된 이름은 하물며 기생충에게도 중요한 법, 이 사건으로 인해 편충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94쪽

생선회 하면 누구나 일본을 떠올릴 만큼 일본의 전통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혹시 우리나라에서 회를 먼저 먹은 건 아닐까? 일본에서 생선회가 널리 퍼진 건 임진왜란 후인 에도시대 이후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전에도 생선회를 먹은 흔적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이 말고도 간디스토마의 알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묘에서 제법 발견되고, 심지어 삼국시대 화장실로 추정되는 구조물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이 여러 차례 나왔다. 예컨대 가장 오래된 화장실로 알려진, 백제 시대에 사용됐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을 발견했고, 그보다 이른 시기의 화장실에서도 간디스토마의 알이 나온 바 있다.
그렇다고 생선회의 원조가 우리나라라는 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시경』에 구운 자라와 생선회 이야기가 나오고 ‘인구에 회자되다’의 ‘회자’가 ‘날생선과 구운 고기’라는 뜻이니, 다른 문화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생선회도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겠지만, 최소한 일본보다 먼저 회를 먹은 건 확실해 보인다.-110쪽

우리나라야 와포자충 감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상기하자. 외국에 나가면, 그게 설령 스웨덴이나 미국이라 할지라도, 물을 끓여 먹거나 메이커 있는 생수를 사 먹길 권한다. 좋은 물을 먹는 데 돈을 쓰는 것이 체류기간, 혹은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물설사를 쭉쭉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것 같아서다.
135
우리나라에는 뱀을 먹는 집단이 존재했다. 군대 말이다. 생존훈련이라고, 식량도 없이 낙하산으로 아무 곳에나 떨어뜨려 놓은 뒤 부대로 찾아오게 하는 이 훈련은 병사들을 강하게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스파르가눔과 서울주걱흡충에 걸리게 만듦으로써 전투력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119쪽

한 환자는 수시로 출몰하는 스파르가눔 때문에 7년간 여섯 차례나 수술을 했단다. 후자의 환자는 공수부대 출신으로, 군부대에 있을 때 낙하산을 타고 깊은 산골짜기에 투하되어 부대까지 찾아오도록 하는, 소위 생존 훈련을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다. 산속에 먹을 거라곤 뱀과 개구리뿐이었는지라 그가 여러 마리의 스파르가눔을 갖고 있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듭된 스파르가눔으로 고생하던 그는 국가에 소송을 제기했고, 2007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그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163쪽

32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미라에서 선모충이 발견된 것처럼 선모충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돼지고기를 먹고 얼굴이 부었다면 돼지고기가 원인이라는 것 정도는 과거 사람들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부정한 것이다. 이런 것들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주검을 건드려도 안 된다."
성경책에 쓰인 이 구절을 보면 성서시대 초기에도 이미 돼지고기의 위험성을 알았던 모양이고, 과거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못 먹게 했던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게 보이는 돼지를 잡아먹은 뒤 쓰라린 경험을 했던 게 한 원인이 됐다고 한다. 7세기 경 모하메드가 식단에서 돼지고기를 금지한 것 역시 선모충의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189쪽

1791년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모차르트의 사인으로 중독설을 비롯해서 연쇄상구균 감염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선모충이다. 모차르트는 죽기 44일 전 돈가스 비슷한 돼지고기를 덜 익혀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감염된 선모충이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인류가 모차르트의 주옥같은 곡들을 즐길 기회를 기생충이 빼앗은 셈이다.
-190쪽

호바스라는 학자는 얼룩말의 줄이 수면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로로 된 줄무늬가 편광현상을 일으켜 파리가 사물을 식별하는 데 지장을 준다고 한다. 즉 얼룩말은 원래 수면병에 취약한 동물이었는데 줄무늬를 만듦으로써 체체파리에 물리지 않게 됐다는 것. (...)진화 과정에서 줄이 있는 얼룩말이 더 많이 선택되도록 압력을 받은 결과라는 건데, 이 실험에 대해 한 언론은 얼룩말의 줄이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파리 격퇴제"라고 격찬했다. 그러니 정 사파리를 가야겠다면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는 게 좋겠다. 그냥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 옷을.-211쪽

지독한 경험을 했을 때 ‘학을 떼다’라는 말을 쓰는 것도 말라리아가 그만큼 지독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호란 때 잡혀갔다 돌아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소현세자의 경우 독살설이 유력하지만, 학질로 죽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
-223쪽

열대말라리아는 겨울철에 16~18도 이하로 떨어지면 전파가 안 되는데, 영하 10도 쯤은 우습게 넘기는 우리나라 겨울을 견뎌 낼 재간은 없다. 삼일열말라리아가 9개월이라는 매우 희한한 잠복기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나라의 겨울이 춥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 온난화가 될 경우, 그래서 우리나라가 확 더워져 버리면 열대말라리아가 유행할 수도 있을까?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계속 걱정하는 사안인데, 지구 온난화는 혹시 백인들의 피가 먹고 싶은 말라리아의 음모가 아닐까?
-231쪽

회충이나 장디스토마처럼 장을 침범하는 기생충은 대부분 별다른 증상을 일으키지 않지만, 폐디스토마나 스파르가눔처럼 조직을 찾아 들어가는 기생충은 필연적으로 병을 일으켜 사람을 고통받게 한다. 더 이상 보약으로 가재즙을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민물게장을 먹을 땐 폐디스토마 유충이 있는지 조심하자. 보름 이상 담근 건지 물어 보는 것만 잊지 않으면, 맛있는 게장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 보름 간 담궈 둘 여건이 안 된다면 하루 정도 냉동시키는 것도 기생충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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