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구판절판


그에게서만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한마디였으나 나는 당신 어머니가 아냐, 라고 그녀는 토를 달지 않는다.
-203쪽

"복숭아가, 달고 맛있더군요, 저쪽 시장에서 어르신들 파시는 게."
조각은 이미 시작한 말을 도중에 멈추지 못한 채, 다만 자기의 말들이 조악한 질감과 형태가 있어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대로 과자처럼 바스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 어절을 떼면서는 뭔가 의도를 담고 한 말이 아니었지만 말을 하는 동안 왠지 거기에 모종의 위협이 담긴 것처럼 상대방이 받아들일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적에는, 당신 부모님이 파시는 과일의 품질과 맛이 좋으며 그런 물건을 파는 부모님 또한 좋은 분들인 것 같다는 그 이상의 뜻을 나타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맥락과 개연성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나는 당신 부모님 이미 찍어놨고 얼굴 다 알아.’ 후환이 두렵다면, 부모님이 안전하길 바란다면 그날의 일에 대해 누구에게든 술자리 안주로라도 입 벙긋하지 말라는 새삼스러운 재확인. 여기다 한층 더 이완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딸 아이의 순면 같은 두 뺨과 작게 돋은 온디콩 같은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면 쐐기를 박는 셈.-204쪽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222쪽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지금 이렇게 두 팔을 둘러 오히려 조금 전보다 포옹을 견고히 하면서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조각은 잠자코 들었다. 그가 그렇게 믿고 말한다면 그의 말이 옳을 것이었고, 팔에 깊이 힘이 들어간 것은 이 기이한 제사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뜻했다.-236쪽

잊어버려.
그녀는 멈춰 선다.
왠지 언젠가 비슷한 장면이 실제로 있어서 그런 말을 누군가한테 했던 것만 같다.
그녀가 방역 현장을 제삼자에게 목격당한 경우는 많지 않다. 언제였더라? 순간 한기가 돌고 콧속이 간질거린다.-243쪽

이번 일만 끝나고 날씨가 풀리는 대로 녀석에게 산책을 좀더 자주 시켜줄 것이다. 보통의 노부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목줄에 개를 끌고 다니고, 조금만 가면 사람이 개를 끄는지 개가 사람을 끄는지 모를 만큼 빨라지는 걸음을 숨이 찬 듯 쫓아가며, 역시 개를 산책시키는 다른 이들과 눈인사도 나눌 것이다. 동네의 다른 개들도 만나게 해주고, 서로 눈 마주치게 놔두어 탐색의 시간을 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개 주인들은 혈통이나 천 것을 운운하며 꺼릴지도 모르지. 분명한 것은 일상생활의 확장에 불과한 이런 평범한 약속을 운명처럼 걸어두어야 할 만큼 투우는 쉽지 않은 상대다.
-277쪽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283쪽

최 씨의 대답을 듣기 전에 경고음이 몇 번 흐르다가 전화가 끊어진다. 주머니가 가볍고 남은 동전은 이제 없다. 단지 동전이 바닥났을 뿐인데도 조각은 지금껏 형태를 유지해온 자신의 남루한 삶 전체를 비워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286쪽

그들은 손톱을 보고 바로 이어서 손톱 주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지도 모르지. 도저히 당신과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식이 아니라는 편견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만 침묵하거나 헛기침하며 흘끔거리겠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332쪽

마지막까지 대출혈 자폭 서비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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