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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 ㅣ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90년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게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90년대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쳤던 사람으로서 그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다소 씁쓸하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90년대를 자주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도 그랬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명의 친구들은 나와 동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삼총사가 되어 함께 지낸 아이들에게는 다른 친구들이 끼어들기 힘든 틈을 가졌다.
이야기의 처음을 열었던 지혜는 자신의 눈과 귀로 받아들인 것을 다시 내보내지 못하는 아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신세경이 맡았던 소이가 그랬듯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모든 걸 다 기억하고, 그래서 폭주하는 기억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아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을 싫어하고 말수도 없고 내성적인 아이다. 그러나 사실 지혜는 말도 많고 삐지기도 잘하는, 셋이 있을 때는 적극적인 성향의 아이였다.
준모 역시 사연 많은 아이다. 틱 장애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나쁜 뚜렛 증후군이었다. 영화 '수상한 고객들'에서 임주환이 맡은 김영탁이 그랬다. 의도하지 않아도 입만 열면 저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준모의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고 중학교 시절과 지금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이가 얼마나 큰 고통과 갈등을 겪었을지 얼마든지 짐작 가능하다.
그리고 작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는 세미다. 다단계 사업으로 지명수배가 되어 이혼도장을 찍고 미국으로 도피한 엄마, 엄혹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딸을 맡겨놓고 나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아빠를 둔 이 아이가 한남동 대저택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하여간 드라마 탓이야. 요즘 판검사가 무슨 대수라고. 품위 없게."
할머니가 품위를 따질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33쪽
1994년 여름,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384명이었다.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폐사한 가축의 빈 우리를 뉴스에서 보았다. 저런. 뜨거운 물에 우린 잎차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할머니가 단언했다. 종말이 가까웠다니까요. 그들은 반팔 실내복 위에 칠부 소매의 얄따란 카디건을 덧입고 있었다. 그 집의 실내온도는 언제나 25.5도와 26도 사이를 유지했다. 나의 조부모는 한의사의 조언대로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일만큼 해로운 건 없다고 믿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얼음도, 설탕도, 콜라도, 배달 치킨도 먹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경건하지 않은 삶 말이다. -62쪽
1994년의 여름이란, 그 시간을 살아본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는 끔찍한 뜨거움이었다. 그 더운 날에도 세미는 방학 내내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찜통 더위 속에서 겨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낡은 선풍기 한대가 도는 도서관에서 세미는 자신보다 하루라도 더 먼저 태어난 책들만 읽었다. 열여덟 인생이 지나치게 무거워서, 떠밀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게 안쓰러웠다.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엄마, 미워 죽겠지만 내칠 수 없는 아빠, 두렵고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할머니, 그리고 누가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고모까지. 아이인데도 이미 어른으로 웃자라 버려야만 했던 이 아이의 인생이 사주 보는 젊은 아가씨에게도 보였나 보다.
"학생은 꽃이에요, 절벽에 핀 풀꽃. 잊고 잊히며 살아야 해요.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오래 안고 가지 말아요. 무슨 일이더라도."
잔디밭에서 아무 풀도 짓밟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여자는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다.
"사무쳐도, 아파도, 다 흘려보내요. 내 것이 아닌 듯. 그러면 꺾이지도 밟히지도 않을 거예요." -88쪽
절벽에 핀 외로운 풀꽃. 잊고 잊히며 살아야 한다는데, 그게 쉽게 된다면 인생이 이리 무거웠겠는가. 다 흘려보내라고 말해주지만, 흘려버리게 어디 세상이 가만 두던가. 세미의 엄마가 세미를 낳은 건 스무 살 때였다. 몸은 성인이었지만, 부모는 모두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소한의 바람막이도 되어주지 못한 분별 없고 무책임한 못난 부모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 부모도 행복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잖아!
준모의 엄마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아무리 애원해도 함께 가주지 않던 아들이 모처럼 기분 좋았던 어느 날 엄마를 따라 교회를 찾았다. 아아, 그런데 그 교회란 것이 흔히 보는 장로회나 감리교, 침례교 혹은 성결교 같은 게 아니었다. 교회당도 아닌 옥상에서 집회를 갖고 비닐봉지를 뒤집어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란, 내가 준모라도 혼비백산 도망칠 것 같다. 이후 아이가 더 마음의 문을 닫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면허 언제 땄어?
“안 땄는데.”
“그럼, 운전 잘해?”
“몰라, 오늘이 처음이야.”
“아, 미쳤어 정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지혜는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세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쓰는 미니 승합차의 열쇠를 주면서 트렁크에 실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지고 가라고 했다. 차를 통째로 가지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차가 없어진 사실을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맨 먼저 당황할 것이고 곧 화를 낼 것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하느님에게 다 일러바치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구할 테니까. 그리고 머잖아 편안해질 테니까. -145쪽
교회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생각이 많은 요즘이었기 때문에 더 답답해졌다. 오 마이 갓!
작품 말미에 내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해야 하는 사건이 터진다. 스무살을 바라보고 있던 열아홉의 5월이었다. 그러니까 고3 5월이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돌봐야 할 사람을 까맣게 잊었던 것은 욕먹을 일이긴 했지만 하필 그때 그런 일이 터진 건 지독히 나쁜 우연이었다. 도움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정말 급한 일 있을 때 불러달라고 했던 걸 기억해준 건 고마웠다. 그렇지만 그 대가가 지독했다. 준모보다도 지혜에게. 무엇도 내버릴 수 없는 기억력을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그랬다. 비밀을 공유해준 대가로 이후 지혜는 자신을 가두고서 살아야 했다. 이게 정말 누군가가 모욕당하지 않는,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었을까? 문득, '아이 엠 러브'에서 틸다 스윈튼이 떠올랐다. 당시 그녀의 입장과 그녀가 갈망하던 모든 것에 동의하고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그 타이밍이 아들의 죽음 뒤였기 때문에 온전히 인정해줄 수 없었다. 꼭 그런 기분. 이 선택을 반드시 해야 했던 거니?
본인의 잘못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사건이었다면 아이의 선택을, 아이가 만들어낸 비밀에 동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책임소재가 분명히 따라올 일에 이런 식의 처리는 핑계로도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놓고 십여 년 뒤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의 모습은 서로를 바꿔버린 느낌이었다. 잊고 잊히며, 다 흘려 보내서 꺾이지도 않고 밟히지도 않게 변한 것 같다. 대신, 그 멍에는 다른 사람에게 옮아갔다. 안녕은 한 명만 한 것이 아니라 셋이 같이 해버렸다.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 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228쪽
혼자 남겨지는 게 싫었는데, 사실은 나 혼자만 남겨지는 게 끔찍했다. 누구라도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모두 함께 아침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은 더 잔인한 일 아닌가. 슬프고 슬픈 일이다.
직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아주 천천히 읽었다.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빠르게 읽히지 않아서 답답했고, 재미가 있음에도 느린 속도 때문에 갑갑했다. 이 작품은 아주 빠르게 읽힌다. 이야기도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제 몸을 찢었지만 나비가 되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던 아이들의 이야기에 연민을 갖고 읽어냈다. 시작은 지혜가 열었고, 마무리는 준모가 닫았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전반적인 진행은 세미가 맡았다. 나름의 배분일 테지만, 다소 균형이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말미의 이야기가 무거운 기분을 더 가중시켜서 끝맛이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준모가, 본인도 충분히 어렸던 그 아이가 마지막에 베푼 배려는 뜨겁고도 아릿했다. 너의 그린란드는, 너의 사막은 또 얼마나 춥고도 고독할까. 그래도 네 말을, 너의 욕을 알아들을 수 없는 그곳에서 네가 자유로울 거라고 위안을 가져본다. 얼음으로 가득한 성에서 엘사가 외롭지만 자유함을 느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