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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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드라마 탓이야. 요즘 판검사가 무슨 대수라고. 품위 없게."
할머니가 품위를 따질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33쪽

부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혜는 싸늘하고 냉소적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애가 아직 그들을 포기하지 않은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어쨌든 상대를 포기하기 전의 상태이므로, 지혜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46쪽

1994년 여름,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384명이었다.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폐사한 가축의 빈 우리를 뉴스에서 보았다. 저런. 뜨거운 물에 우린 잎차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할머니가 단언했다. 종말이 가까웠다니까요. 그들은 반팔 실내복 위에 칠부 소매의 얄따란 카디건을 덧입고 있었다. 그 집의 실내온도는 언제나 25.5도와 26도 사이를 유지했다. 나의 조부모는 한의사의 조언대로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일만큼 해로운 건 없다고 믿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얼음도, 설탕도, 콜라도, 배달 치킨도 먹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경건하지 않은 삶 말이다.-62쪽

나는 도서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름방학 동안 이곳은 거의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넓지 않은 열람실에 낡은 선풍기 한대가 권태롭게 돌아갔다.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시켜주는 바람이었다. 아릿한 먼지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졌다. 서가는 어둡고 서늘해서 숨어 있기 좋았다. 나는 세계문학전집이 순서대로 꽂힌 책장 밑에 쭈그려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각권의 맨 뒷장에는 초판 발행일이 인쇄되어 있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보다 하루라도 먼저 나온 책들만 읽었다.-64쪽

책의 어떤 페이지에도 밑줄은 치지 않았다. 나만을 위한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해서 거기 새겨진 의미들이 내 것이 될 리 없을 테니. 나보다 오래 존재해온 글자들이 이 세계 어딘가 낡은 책장들 속에 납작 엎드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65쪽

그러고 보면 세미와 나 사이에는 거의 항상 지혜가 있었다. 셋은 비겁하고 안전한 숫자였다.
-127쪽

"면허 언제 땄어?
"안 땄는데."
"그럼, 운전 잘해?"
"몰라, 오늘이 처음이야."
"아, 미쳤어 정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지혜는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세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쓰는 미니 승합차의 열쇠를 주면서 트렁크에 실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지고 가라고 했다. 차를 통째로 가지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차가 없어진 사실을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맨 먼저 당황할 것이고 곧 화를 낼 것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하느님에게 다 일러바치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구할 테니까. 그리고 머잖아 편안해질 테니까.-145쪽

각진 얼음 조각을 억지로 삼킨 듯 목구멍이 아렸다. 자정께 받자마자 끊는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엄마도, 성우 오빠도 이 집 전화번호를 알 리 없었다. 서툰 희망이 생 전체를 서서히 좀먹어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체념하는 법을 배우기에 적절한 밤이었다.
-167쪽

준모는 과연 운전을 잘했다. 바르고 절도있는 운전이었다. 횡단보도의 금을 밟기 전에 부드럽게 멈춰 서고, 완전히 초록 신호등이 들어온 다음에야 움직였다. 누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습격당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쎄렝게티 초원의 기린처럼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였다. 지혜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초식동물인 척 살 수 있을까?
-181쪽

출장 정원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정원은 나날이 황량해졌다.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채 떨어지지 않은 홍시 한 개가 매달려 위태로이 흔들렸다. 봄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고집스럽게 천천히 진군하여 온 세상을 점령할 것이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때가 오면 나는 여기를 떠나 또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뿌리라는 게 내게 있기나 하던가. 반포 주공아파트를 떠나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먼 곳에서 여기 한남동을 그리워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감나무에 홀로 매달린 열매 하나는 채 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긴 겨울을 살아남은 것이었다.
-207쪽

"내가 마음은 안 그런데 완이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고모는 말끝을 흐렸다. 고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모는 완이가 옆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아이라는 존재에 옭매여 살고 있었다. 완이를 버거워하고 또 그만큼 사랑했다.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명제는 참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부모가 행복하다는 뜻은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213쪽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 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228쪽

"아니, 나도 같이 있을 거야."
자꾸 혀가 말렸지만 나는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애썼다. 나 역시 진심이었다. 진심이라는 단어에 영원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때의 나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건 혼자만 배제되는 것이었다. 비겁하다고 낙인찍히는 것이었다.-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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