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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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오카노 유이치는 1950년 생이다. 이미 환갑이 넘은 그는 동글동글한 체형과 대머리 때문에 페코로스(작은 양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50년 나가사키에서 출생했고, 젊어서 도쿄에 올라가서 일을 하다가 아내와 이혼 후 아이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서히 치매가 진행되기 시작한 어머니와의 일상을 네컷 만화로 그려냈다. 지역 정보지에 싣던 이 만화를 자비 출간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순식간에 전국 서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수히 네컷 만화만 담긴 것인 줄 알았는데 에세이처럼 글도 나오고 가끔 시도 나온다. '페코로스'라는 말은 입에 잘 안 붙지만,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는 제목은 무척 애잔한 느낌을 갖게 한다. 처음엔 집에서 어머니를 돌보았지만 결국엔 힘에 부치다는 걸 인정!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억은 점점 소멸되어 가서 아들을 못 알아보는 사례도 무척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내밀면 어머니는 쓰담쓰담~ 만져보다가 아들을 기억해 내고는 언제 이렇게 대머리가 되었냐고 화들짝 놀라신다. 



치매 걸린 엄니도 슬프고, 대머리가 되어버린 자신의 늙어감도 슬플 것 같은데, 페코로스 씨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칭찬 같아서 기쁘고, 그 머리를 찰싹찰싹 때리는 어머니가 덕분에 운동도 된다며 초극강 긍정모드를 보여주신다. 치매 엄니를 돌보는 아들이 갖춰야 할 첫번째 마음자세라는 것이 바로 이 긍정적 수긍이 아닐까.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러 가기 전에 병원에서 출생 당시 아이가 뒤바뀐 걸 나중에 알아차리고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부모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는 무척 슬플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니까 예전에 가을동화가 이런 내용이었지 않나?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 것으로 생각한다.(문근영이 이걸로 뜨지 않았나?)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무척 담담하게 진행되었다. '신파'로 흐르지 않아서 무척 좋았다. 이게 우리나라였다면 7번 방의 선물처럼 죽어라 울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관객은 실컷 울고서 감동은 잊은 채 극장을 나왔을 것이다.(난 그랬다.)


이 작품을 보니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 짠하게 뽑아냈다면 잠시 찡하게 울고는 여운은 짧았을 것 같은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라앉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을 해주어서 긴 여운과 찐한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녹내장 증세가 있는 엄니의 눈에 푸른 상자가 있다는 표현이 인상 깊다. 그 상자 안에는 엄니가 보아온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정작 당신은 그것들을 자꾸만 잊어가고 계시지만......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엄니의 웃음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아직 모르는 아기의 해맑은 웃음은 서로 닮아 있다.

원체도 늙어가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습성을 닮아가는 게 인생일진대, 치매를 겪고 있다면 어린아이로의 회귀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이 나올 테지.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떠오른다.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려버린 수애가 여태껏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병이 진행됨에 따라 드러나는데,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주었던 동료, 자라면서 내내 구박해 오던 사촌 언니에게 묵은 감정을 터뜨렸다. 이 작품 속의 어머니는 그렇게 미운 감정은 마음 속에 많이 담아두지 않으셨나보다. 젊어서 무지 고생시켰던, 지금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남편을 즐거이 기다리고 반갑게 맞아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요양원에서는 엄니와 같은 분들이 여럿 계셨을 것이다. 반가이 마주 인사하고 수다도 잘 떨고 헤어졌는데, 알고 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이래놓고 다음에 다시 만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겠지. 마치 오랜 지인이었던 것처럼......



항구에는 크레인이 있었다. 영어 크레인crane에는 '학'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종이학이 떠 있는 항구로 느껴졌다고 한다.

원폭의 피해를 입은 나가사키에는 천 마리 종이학의 기도가 내려오고 있다. 문득 고베 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열렸던 첼로 연주가 떠오른다. 이세 히데코의 '천개의 첼로' 말이다. 


페코로스 씨가 도쿄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이혼하고 돌아오던 그때의 마음은 몹시 낙담해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는 가족이 있었고 추억도 있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늦지 않게 돌아왔다고 안도하는 작가의 표정이 눈에 그려진다. 20년 만에 돌아왔더니 그 덕분에 변해버린 모습의 차이점이 신기하고 재밌고, 그 바람에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고향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이 작가의 초절정 긍정 자세는 여전히 힘이 넘친다.



치매에 걸린 덕분에 아버지를 만나곤 하는 엄니. 그 엄님가 기다리는 아부지. 그러니 치매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진심일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생각을 해야 견딜 수 있는 게 치매가 아닐까 싶다. 죽은 지 십년도 더 되는 아부지가 다녀갔다고 말하는 엄니께 좋았겠다고 맞장구 치는 아들의 넉살이 정겹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내복 바람으로 추운 거리를 내달린 아버지의 기억이 찡했다. 내 친한 지인의 아버지는 딸이 오밤중에 굉장히 아팠는데, 아픈 아이를 빨리 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본인의 옷을 정갈하게 챙겨 입은 뒤 정작 아이는 내복 바람으로 업고 나갔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나중에 아내한테 엄청 욕을 먹었다고...;;;; 아무리 급한 상황에서도 남들의 시선을 더 먼저 의식해야 했던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 괜히 내가 지인의 어머니 마음에 빙의가 되고 말았다.



간호사들도 환자를 돌보는 데에 베테랑이 되어 있겠지. 엄니의 기억 속 의식은 수줍은 새색시의 그때에 이미 닿아 있겠지. 



원폭을 경험한 나가사키 출생 페코로스 씨. 그리고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겪은 일본인 페코로스 씨. 그런 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따뜻한 시선이 더 애틋하고, 그가 말해주는 어머니와의 시간에서 깊은 울림을 느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잊어버렸어도 엄니는 살아있다.

대지진을 겪은 이 나라에

다른 살아남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

아니, 아버지도- 아버지도 살아 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는 일 없는 가족의 시간 속에 -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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