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았어요. 부부가 사는 마을은 예로부터 물 맑고 인심이 좋았다는 얘기가, 구청 홍보 자료에만 있었죠. 마을 개천은 공장 폐수로 오염이 되었고, 인심은 개천 물만큼이나 더러웠어요.-9쪽
"일수야, 학교에 가서는 그러면 안 돼.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네 생각을 정확하게! 그냥 '몰라요' 하면 바본 줄 알아." 어머니가 신신당부했어요. 일수는 어머니 말씀을 깊이 새겼어요.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한 생각을 담아, "모르는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정확하게 모르는데, 정확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면 안 되니까요. 일수는 정직한 아이였어요.-26쪽
선생님은 특별활동부를 계속 불렀어요.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정말 원하는 부를 골라라.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걸 하지 말고. 그다음 원예부." 일수는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마음은 어떻게 들여다보는 거지?' 어려웠어요. 선생님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알려 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38쪽
"무슨 부로 갈지 정했니?" "못 정한 것 같아요." "휴...... 그놈의 같아요...... 일수는 그럼 서예부로 가라. 지원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말했어요. "네." 일수는 드디어, '같아요'를 빼고 대답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꼬치꼬치 묻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죠. 특별한 게 없는 일수는 그렇게 특별활동부에 들어갔어요.-40쪽
명필은 어느 날 '태극기가 촌스럽다'고 말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어요. 누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한 탓이었죠.
명필 서예학원 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합니다. 원장은 산신령 같은 차림으로 밤에 산에 올라갑니다. 신분을 속이려고 위장하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장에는 그가 쓴 '붓글씨 암호'가 버려져 있습니다. 태극기가 촌스럽다는 말로, 신성한 국기를 모독했습니다. -54쪽
명필은 동네 경찰서에 가서 다섯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어요. '붓글씨 암호'는 중국 상형문자였고, 산에는 '정기를 받으러 올라간다.'는 게 밝혀졌어요. 명필은 '다시 한 번 국기를 모독하면 처벌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풀려났어요. 명필은 세상이 무서웠어요. 산에 갈 때는 꼭 평범한 운동복을 입었죠. 처벌 받는 게 무서워 학원에 태극기를 걸었어요.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써서 태극기 옆에 붙여 놓았죠.-55쪽
일수 씨는 그 후로도 가훈을 써서 돈을 벌었어요.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본부' 회장이 교육구청장이 된 덕분이었죠. 학교에선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우리 집 가훈은 내 손으로' 캠페인을 앞 다투어 벌였어요. 이 학교가 끝나면 저 학교가, 6학년이 졸업하면 새로 들어오는 1학년이 가훈을 필요로 했어요.-99쪽
보증서지 말자 믿을 건 우리 식구뿐
이런 가훈을 적어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가훈을 적어가는 사람들은 대개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돌았어요.
자나깨나 불조심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따위를 적어 달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걱정에 가득 찬 표정을 갖고 있었죠.
안전제일이라든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같은 가훈을 써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글은 잠시 숙제로 제출되었다가 부모님의 공장이나 분식집 벽에 붙게 될 것이었죠.-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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