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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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28쪽

아버지는 코앞에 대령하지 않으면 양말조차 못 찾아 신는 ‘광산 노씨 만호공파’ 남자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드실 끼니거리는 준비해놓아야 했다. 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진경이 그걸 너무 서운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열 일 젖혀두고 달려가지 않는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 바랐다.
-183쪽

재형은 자리에 선 채 꼼짝하지 않았다. 난데없는 충동이 등을 찔러 온 탓이었다. 마리의 목줄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마리, 네 집으로 가’라고 소리 질러 내쫓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구급차를 몰아 멀어지는 차를 쫓아가고 싶었다. 앞을 가로막고 차를 세워서 마리를 돌려주고 싶었다. 이 개는 당신의 ‘마리’야. 마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책임진다는 거야. 편의에 따라 관계를 파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210쪽

재형은 머리를 들었다. 대문간에서 터지는 총소리가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등허리 밑을 흔들던 떨림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턱 밑에서 대동맥이 고함치듯 벌컥거렸다. 분노에서 비롯된 광기가 소리로 발화돼 잇새를 뚫고 나갔다.
"쏴, 나도 쏴봐. 개새끼들아."-219쪽

스타는 그의 품 안으로 한 발짝 다가들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내리고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의 가슴으로 온기가 물결치듯 번졌다. 사람을 싫어하는 이 예민한 아가씨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재형에게만 보여주곤 하던 애정의 몸짓이었다. 그는 스타의 어깨를 쓰다듬고 등을 두들기고 귀밑을 어루만졌다.머리를 기대 오는 스타의 심장 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구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쿠키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개들을 총구 앞으로 밀어냈다는 자책과 수치심으로부터, 개들을 모두 잃어버린 충격으로부터, 홀로 된 외로움으로부터.
"스타, 살아 있었구나."-222쪽

여론은 화양 봉쇄의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른다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전 국민을 종교적 수준의 공포와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각 언론사와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가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빨간 눈의 서울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화양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의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에겐 화양과 빨간 눈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230쪽

링고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태어나 처음 눈을 보던 날, 잿빛 하늘을 나폴나폴 날아다니는 것이 흰 나비 떼인 줄로 알았던 시절, 나비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날뛰고 짖어댔던 강아지 시절, 두 아이와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 팔려갔던 겨울을. 그들이 링고의 첫 주인이었다. 개의 삶이 인간의 변덕에 좌지우지된다는 걸 알려준 이들이기도 했다. 인간의 아이들 손에서 고무공처럼 구르던 강아지는 봄이 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링고의 몸은 아비만큼이나 커버렸다. 머리를 들면 입이 주인의 가슴에 닿았다. 각목 정도는 우습게 씹어서 부러뜨릴 만큼 이빨이 크고 날카롭게 자랐다. 주인 여자는 링고가 너무나 많이 먹고, 너무나 힘이 세고, 너무나 늑대 같아서 이젠 귀엽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들 가까이에 가기만 하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기의 목을 핥았다가 사흘 동안 묶여 창고에 갇히기도 했다. -245쪽

링고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이전의 사랑을 되찾을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바보짓을 거듭했다. 강아지 시절에나 하던 애교를 피웠다. 몸을 비비고, 올라타고, 다리를 벌리고 나자빠졌다. 잡은 즉시 먹어치우던 토끼나 다람쥐, 새를 선물로 가져다 바쳤다.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주인의 실내화를 현관 앞에 물어다두기도 했다. 사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트럭을 몰고 찾아왔다. 주인은 털과 이빨을 세우고 침입자를 처단하려는 링고에게 재갈을 물리고 목줄을 걸었다. 낯선 남자는 링고를 커다란 철장에 가두고 트럭에 실었다. 트럭이 멈춘 곳은 한적한 교외에 있는 가족 레스토랑 사설 동물원이었다.
이후 링고는 철장을 벗어나 살아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근육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무대는 챔프투견장 링 안이었다. -246쪽

"걸을 수 있겠소?"
남자의 두 번째 발길질에서 자신을 구해준 노인이었다. ‘백 기사’라 불리는 화물차 경력 40년 차 구급차 기사. "네." 하는 순간, 왈칵 흐느낌이 샜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현진에게 면회를 가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좀 전에 일어난 일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꿈 깨라고.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저들은 선량한 시민이었다고. 너희들이 살아서 이 도시를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266쪽

대장은 가방을 철장 문 앞으로 끌고 왔다. 링고는 스타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철장 쇠살 틈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스타의 냄새를 맡았다. 스타의 차가운 입술을 핥았다. 코를 맞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콧등은 말라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잿빛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링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고개를 돌려 간절한 심정으로 대장을 올려다봤다.
스타를 산막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예전처럼, 쉼터에서 산막으로 스타를 데려왔던 첫 밤처럼, 상처를 핥고, 코를 맞대고, 몸을 붙인 채 잠들고 싶었다. 그러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이 지나고 해가 뜨면, 스타가 고개를 뒤로 돌려 친밀하고 편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대장이라면 그렇게하도록 해줄지도 몰랐다.
"링고, 안 돼."-305쪽

수술 후 링고의 몸은 빠르고 순조롭게 회복됐다. 별문제 없이 마취에서 깨어났고 하루가 다르게 상처가 아물었다. 다만 정신적인 쇼크가 문제였다. 재형은 제 짝의 죽음을 그토록 슬퍼하는 개를 본 적이 없었다. 스타의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스타의 얼굴에 코를 문지르고, 낑낑대며 입술을 핥고, 스타의 몸을 주둥이로 밀어댔다. 스타를 살려내라는 눈으로 재형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재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녀석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도 너만큼 그걸 원한다고. 그럴 수가 없어 고통스럽다고.
-323쪽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쪽

마야. 부르면 눈을 떴을 때, 진짜 마야의 눈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다갈색 눈이 그에게 물어왔다고 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사흘 후, 마야는 죽음을 맞았다. 대장이 부르는 소리를 찾아 눈보라 속을 내달린 대가였다. 마야의 노구는 폐렴을 얻었고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던 석 달 후에야 마야의 죽음을 알았다고 했다. 마야는 재형의 썰매에 실려 설원에 묻혔다. 재형이 알래스카를 떠난 이유였다.-346쪽

그들은 노상 천막 안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으로 죽었다. 기존 환자는 경기장에서 링크로, 하루에도 수백 명씩 거처를 옮겨 가는 중이었다. 빨간 눈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았다. 체육관을 통제하는 군인도 날마다 줄어들었다. 의료팀처럼, 충원 없이 차근차근 소모되고 있는 모양새였다. 보급 헬기는 이틀째 오지 않았다. 기름이 없어 난방도 끊겼다. 작동되는 건 전기와 수도뿐이었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얘기 같았다. 죽든가, 살든가.
-354쪽

그들이 떠난 후 더 충격적인 깨달음이 왔다. 자신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찾으려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아버지와 현진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도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유의 일이었다.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과 직면하는 게 겁이 났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건강진단을 받지 않으려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모르는 게 나았다. 모르는 동안은 절망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확인과 함께 찾아들 무서운 고통을 그녀는 몸서리나게 잘 알고 있었다. 난파당할까 봐 두려워서 차마 울 수조차 없는 고통이었다.
-355쪽

아버지. 손 씻고 식사하세요. 이제 밖에 나가시지 마시고요.

식탁 가장자리를 빙 둘러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의 쪽지들이 여섯 개나 붙어 있었다. 이 무슨 멍청한 짓일까. 손 씻고 식사하라니. 밖에 나가지 말라니. 아버지는 오지도 않았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이 무슨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짓일까.
대상도 없는 노여움이, 진창 같은 절망이, 핏속을 줄달음쳤다.
그녀는 빈 공기에 밥을 담았다. 밥 한 술을 퍼서 흐느낌이 흐르는 입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었다. -359쪽

링고는 끝내지 않을 터였다. 한기준의 숨통을 끊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링고라 해도 지금의 링고처럼 행동할 게 분명했다. 지난 밤 박남철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 그 증거였다. 박남철을 들이받은 건 실수도, 판단 착오도 아니었다. 명백한 선택이었다. 동해를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의 선택. 기준의 말이 옳았다. 그들 부자를 죽인 건 자신이었다. 그는 목 안의 불덩이를 꾹 눌러 삼켰다. 블로우 건을 내리고, 비닐막을 놓고, 산막에서 물러났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개한테 강요할 수는 없었다.
-395쪽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윤주에게 그곳은 재형이었다.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그가 그리웠다. 밤은 미치도록 길었다.-404쪽

화양은 고립된 도시가 아니다. 버림받은 곳이다. 며칠 전부터, 군인들이 거리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군인들도 감염돼 쓰러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고, 정부가 화양 안의 병력을 소모시킨다는 의미기도 하다. 도시를 통제하는 군대를 버린다는 건 도시를 버리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도시를 통제하는 군대를 버린다는 건 도시를 버리겠다는 것과 같으며 이는 화양을 무정부 상태로 놓아두겠다는 얘기나 다를 바 없다. 두 번째 증거는 외곽 병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봉쇄선은 물론이고 산골짜기까지 중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철옹성을 쌓고 있다. 세 번째는 시민들에게 약속한 보호 장비나 생필품이 지금껏 보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버린다’에서 ‘고사시킨다’로 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때에는 전기와 가스, 수도까지 끊을 것이다.
-410쪽

"노수진 씨."
수진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문턱에서 발을 떼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혈과 정액으로 뒤범벅이 된 허벅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가슴에 이빨 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고 목에는 피멍 자국이 둥글게 맺혀 있었다. 새하얀 이불 위에는 한 움큼씩 뽑힌 머리채가 굴러다녔다. 기준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폭행 현장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세계가 파괴된 현장이었다. -417쪽

문득 기준이 떠올랐다. 해 질 무렵이면 찾아와 현진이와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주는 남자. 그녀는 그의 말을 ‘시신을 찾지 못했다’로 들었다. 하루 온종일 베란다를 서성이며 그가 오는 해 질 녘을 기다리며서도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찾았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찾고 나면 그가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에게 한기준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 그녀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살아 있는 한 사람.-421쪽

수만은 될 법한 인파가 광장과 광장 앞 사거리를 꽉 채우고 화양천 다리까지 늘어섰다. 인파만큼이나 많은 횃불들이 활활 타오르며 밤을 밝혔다. 사람들의 함성과 구호는 상공을 맴도는 헬기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를 살게 하라."
죽은 도시의 심장에서 삶이 맥박치고 있었다. 재형의 귓가에선 생매장된 개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다.
-446쪽

화양에서 일상을 앗아간 세상은 화양을 잊은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땅에 묻듯, 시간과 망각 속에 화양을 매장해버린 후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화양에 대한 뉴스는 점점 줄어들었다. 곧 시작될 브라질월드컵 얘기에 밀려 어느 날엔 아예 언급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날 새벽, ‘700미터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려면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터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473쪽

(작품해설 정여울)
그는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썰매개들을 회색 늑대 무리에게 희생양으로 내주고 자신의 가난한 목숨을 지켰다. 그 엄청난 죄책감이 그의 삶을 평생 짓누른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결국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적대적 존재들조차 구원하는 상생의 무기로 되살아난다. 《28》은 대재앙의 잔혹한 리얼리티 속에 가녀린 구원의 상징을 숨겨놓은, 거대한 서사의 미로다.-482쪽

유기동물 문제는 단지 반려동물의 생존권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맺기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은 자연을 보호한답시고 자연을 ‘자원’으로 대상화하고, 자연을 등산로나 휴양지로 이용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한다. 개발의 이면은 파괴와 살상일 수밖에 없다. 《28》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상징적 매개로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인 ‘불평등 계약’의 의미를 성찰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483쪽

인간에게 방해가 된다면 마음껏 ‘살처분’해도 되는 유기견들, 구제역 파동이 올 때마다 생매장당하는 소와 돼지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그것’으로 대상화시키는 잔혹한 합리성이다. 서재형은 동물을 ‘그것’이 아니라 ‘그대’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동물들이 고통받는 세상에서는 인간들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지대에서 동물의 흐느낌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대들의 운명과 우리들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공감의 네트워크. 그것만이 이 무간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열쇠가 아닐까. 그것이 아니면 어떤 대단한 과학도 어떤 화려한 정치도 이 재앙의 도시 화양을 구할 수 없었다.
-488쪽

작가의 말 정유정
인간은 반려동물에게도 가축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할까. 내 대답은 ‘그렇다’였다. 육식하는 자로서,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서, 저들의 삶을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변덕쟁이 폭군으로서 내린 결론이었다. 어떻든지 인간이 먼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저 반대편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야기기도 하다. -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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