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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평점 :
수도권 인근 도시 화양. 불볕이란 이름을 가진 이 인구 29만의 도시에 원인모를 전염병이 발생했다. 최초 발병자는 개 번식사업을 하던 남자였는데, 병에 걸린 개에 물린 이후 눈이 빨갛게 변하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이다가 죽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원에게 전염병이 퍼지고, 응급실의 의사와 간호사가 '빨간눈'에 감염되었다. 발병 후 고열에 시달리다가 폐출혈을 일으키고 길어야 사흘이면 죽게 되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삽시간에 퍼져버렸고, 정부는 도시 전체를 고립시킨 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통제를 해버렸다. 당연히 이 도시 안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흉악하고 추한 범죄가 일어난다.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인이 예사로 일어난다. 공권력은 이 사태를 막지도 못하고 시민을 안전하게 지켜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이 바이러스가 외부로 번져나갈까 전전긍긍할 뿐이다. 살든지 죽든지, 그 모든 것은 이 안에 갇힌 사람들의 복불복이었다.
작품은 여섯 명의 화자를 앞에 내세웠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글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맥락은 3인칭이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물의 내면까지도 드나드는 아주 영리한 시점이다. 첫번째 인물은 알래스카 출신 수의사 서재형이다. 알래스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참여했던 개썰매 레이스에서 화이트 아웃에 빠져버린 재형은 굶주린 늑대의 공격을 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썰매와 자신을 묶었던 끈을 끊어버린 재형은 골절상을 입은 채 조난 당하고, 가족과도 같은 개들은 늑대의 희생양으로 사라진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썰매개 마야의 아이들이었다. 재형을 구해내기 위해 사흘길을 달려온 마야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에게 물어왔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재형이 가졌을 죄의식과 트라우마가 무엇이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결국 재형은 알래스카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서 유기견들을 보호하는 수의사로서 '드림랜드'를 운영한다. 그러나 사이코 패스 박동해에게 매맞을 죽을 뻔하던 쿠키를 구해준 것이 도리어 악연이 되어서 언론에 의해 온통 난자당한다. 그 악연의 한 고리에 윤주가 있다.
김윤주 기자는 자신이 얻은 제보에 따라서, 나름의 합리적 의심을 거친 채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왜곡된 진실은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더구나 인수공통전염병이 돌고 있는 화양에 대한 그녀의 기사는 더 큰 해일을 몰고 와서 수많은 유기견들을 만들어낸 것도 모자라 살처분 과정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 살처분의 현장에서 개들의 살려달라는 절규를 듣고 온몸으로 울어낸 그녀가 이후 화양에서 겪은 고초는 어쩌면 참회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수진은 화양 의료원의 간호사다. '네수진'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도무지 거절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이 착하고 순박한 아가씨는 무수한 직장동료와 환자들이 '빨간눈' 괴질에 걸려 죽음의 문으로 걸어가는 과정을 묵묵히 배웅해야 했다. 끔찍한 전염병과 학살이 난무하는 이 무서운 도시의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웃어갈 틈을 준 캐릭터가 있다면 그건 노수진이었다.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군부대 방문기며, 나이팅게일 선서식에서의 꽈당 수진도 그랬다. '네'밖에 못하는 이 처자의 이름이 '노' 수진이라는 것에서 작가의 네이밍 센스가 돋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행방을 알지 못하는 군인 남동생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밥을 차린 그녀의 행보가 안타까웠다. 인정하기 싫어서 도피하고자 했던 처절한 쌀밥 한그릇이 아니던가.
문득 기준이 떠올랐다. 해 질 무렵이면 찾아와 현진이와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주는 남자. 그녀는 그의 말을 ‘시신을 찾지 못했다’로 들었다. 하루 온종일 베란다를 서성이며 그가 오는 해 질 녘을 기다리며서도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찾았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찾고 나면 그가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에게 한기준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 그녀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살아 있는 한 사람. -421쪽
한기준은 소방대원이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그의 불타는 복수심은 유일한 동물 화자 링고와 닮아 있다. 둘은 똑같이 외쳤다.
"이 개새끼들이 내 아내를 죽였어."
링고는 살고 싶다는 열망보다 더 강하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내 사랑을 죽인, 내 아내를 앗아간 자를 향한 무서운 집착은 생명을 돌보지 않은 채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그 절절한 외침을 재형은 알아들었다. 자신 역시 자신의 사랑하는 개를 죽게 한 상대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내리지 못했다. 인간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을 개에게도 요구하지 못하는 그에게선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여기게 하는 허영도 없고, 짐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희망'을 찾아냈다. 그는 성자가 아니고 절대자도 아니다. 그도 어린 시절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가족같은 개들을 늑대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지울 수도 없는 과거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가 어찌 보면 자신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상대를 구하기 위해 제 몸을 던졌을 때 모든 속죄가, 진정한 구원이 일어났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에서 주인공이 식량으로 내놓지 못했던 제 팔을 어린 소년을 구해내기 위해서 작동하는 엔진 속으로 밀어넣었던 것처럼!
인간의 힘과 지혜가 힘을 쏟지 못하는 버려진 도시 화양에서 죽은 자가 이유 없이 죽었듯이 살아남은 자도 마땅한 이유로 행운을 거머쥐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에겐 더 큰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이곳에선 가장 죄없는 자들이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가장 죽어 마땅한 자가 지나치게 오래 살아남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뜨겁게, 가장 인간적으로 보였던 이는 늑대개 링고였다.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던 서재형의 헌신 덮고도 남을 매력이었다.
화양이 고립되었던 기간을 뜻하는 숫자 28. 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숫자는 참으로 속절없어 보인다. 28일은 바이러스의 원인을 규명하기에 턱도 없고, 대책을 마련하기에도 무리인 숫자였지만 29만의 인구를 무참히 학살되도록 방치할 수 있는 긴 숫자이기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고 억울하게 희생당했건만, 이 저주받고 버림 받은 도시 바깥의 사람들은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침묵했다. 약속이나 했듯이 일제히...
화양에서 일상을 앗아간 세상은 화양을 잊은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땅에 묻듯, 시간과 망각 속에 화양을 매장해버린 후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화양에 대한 뉴스는 점점 줄어들었다. 곧 시작될 브라질월드컵 얘기에 밀려 어느 날엔 아예 언급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날 새벽, ‘700미터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려면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터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 -473쪽
이런 비겁한 침묵이, 사악한 카르텔이 화양에서만 있었을까. 80년 광주에서,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니 지금까지 줄곧... 우린 얼마나 많은 '살려달라'는 외침에, '살고 싶다'는 절규에 등을 돌리고 살아왔을까. 그들의 화양이 언제라도 내가 사는 곳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표지의 파란 숫자는 사실 붉은 핏물이어야 마땅했지만, 차마 붉게 표시하지 못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서늘하게 파란 핏물이 선혈이 낭자했던 이곳의 참혹함을 더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느낌마저 일었다. 영화 판권이 이미 팔렸다고 알고 있는데, 여러모로 영상으로 만들기 좋은 요소를 가진 작품이다. '붉은 눈'과 설날 연휴를 낀 1월과 2월의 '하얀 눈' 풍경은 아주 대조적일 것이고 고도의 연기력을 요구하겠지만, 관객의 마음을 반드시 사로잡고 말 스타와 링고의 러브 스토리도 기대가 된다. 다분히 영화 '감기'와 겹쳐질 내용이지만 더 큰 울림과, 그리고 더 큰 관객몰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한기준 역에 하정우를, 서재형 역에 강동원을, 김윤주 역에 공효진을, 박동해 역에 류승범을 가상 캐스팅 대상으로 꼽았다. 상상만 해도 그야말로 드림팀이다.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정유정 작가의 책인데 첫만남이 지나칠만큼 격정적이었다. 잠시 숨좀 돌리고 작가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야겠다. 2013년이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내게는 올해의 베스트였다.
덧글) 유일하게 발견한 오타가 있다.
459쪽
그 한복판로 들어가버렸고 >>>한복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