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크로마뇽 시리즈 1
정준호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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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가 비하할 때 많이 사용하는 비교대상인 '기생충'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기생충의 역사란 곧 인류의 역사라는 것 또한. 기생충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인류는 팔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 왔고, 기생충은 또 그런 인간들을 따라잡거나 따돌리면서 열심히 진화해 왔다. 놀라운 공생 관계다. 


구대륙의 인간들이 신대륙으로 넘어가면서 무수한 질병을 묻혀 갔다. 바로 기생충들이다. 


천연두는 오랜 세월 인간을 위협해 온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특히 16세기 대항해시대 직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럽인들이 들여온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는 원주민 인구의 90%가 사망하기도 했다. 1980년 세계 보건기구가 공식적으로 천연두 박멸을 선포하기 전까지, 천연두는 한 세기 동안 5억여 명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200쪽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기생충은 살맛이 났다. 고여있는 물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대규모의! 정착생활도 기생충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기술혁명으로 교통이 발달하자 거의 공간이동 수준으로 기생충들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도 인간들이 그렇게 해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운송 수단의 발달은 인간뿐만 아니라 기생충에게도 혁명이었다. 먼 거리를 단시간에 이동할 수 있는 인간에 편승해 기생충이 번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7세기 노예무역이 극에 달한 시기, 서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로 넘어간 각종 기생충들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 충분히 살펴보았다. 21세기에는 17세기와는 또 다르다. 17세기에는 서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성질 급한 기생충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는 시간이다. 이제 대서양을 넘는 데는 겨우 한나절이 걸린다. 지구 전역이 비행기와 컨테이너 선박이라는 크고 빠른 네트워크로 엮이게 되면서 기생충의 전파가 더욱 손쉬워졌다. -221쪽


이런 사정들을 알고 나니 난감해진다. 더 빠르게, 더 멀리 퍼져나가는 기생충의 질주를 막기 위해서 인류의 진보도 같이 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고 한다면, 피해를 줄이고 도리어 기생충을 이용해서 얻을 것은 얻는 방법을 택하는 게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정답이 아닐까. 


기생충에 대한 답은 기생충에 있었다. 차세대 살충제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곤충에 기생하는 곰팡이다. 곤충 병원성 곰팡이라고 불리는 이 균류는 동충하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곤충을 감염시킨 곰팡이는 몸을 파고 들어가 곤충을 죽이고 그 몸을 영양분 삼아 자라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곤충은 저마다에 기생하는 곰팡이 한 종씩을 가지고 있다. 곰팡이들 중 백강균과 녹강균은 이미 메뚜기나 흰개미 방제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효과 또한 입증되었다.  -236쪽


동충하초! 기생충도 놀라웠는데 곰팡이까지! 우리가 지저분하거나 더럽다고 느끼는 것들의 막대한 영향력과 어마어마한 잠재력에 여러 번 놀라게 된다. 무지해서 모를 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에게 말이다.


알레르기나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 같은 자가면역질환들은 우리 몸의 면역계가 주변의 무해한 물질에도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염증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이런 질병들이, 장내기생충을 찾아보기 힘든 선진국이나 도심지에서 특히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생각했다. 자가면역질환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은 장내기생충 박멸이 완료된 시점과 겹친다. (...)이렇게 탄생한 이론이 바로 위생 가설이다. 인간이 지나치게 위생적인 환경에 살게 되면서 면역계를 조절해 주던 장내기생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노출되어야 하는 기생충과 미생물들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면역계가 모든 것에 과민 반응을 한다는 내용이다. 위생 가설에 기초한 다양한 시도들은 지금까지 불치, 혹은 난치성으로 분류되던 자가면역질환에 상당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248쪽


지나치게 깨끗한 환경이 도리어 인간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말라리아에 대한 면역력이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 말라리아에 더 취약한 것처럼. 뿐아니라 기생충 문제는 경제적으로 양극화된 세계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북한이 바로 그 소외지역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굶주림과 영양 결핍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북한 주민들. 저 멀리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지척에서 기생충 감염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인도적 차원에서, 또 우리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기생충의 역사를 짚어 보았다.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였고 앞으로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라는 것도 적절히 강조했다. 자료 사진들은 꽤 충격적이기도 했는데 앞으로 기생충을 무시하는 발언은 섣불리 하지 못하겠다. 큰 코 다칠라. 


무척 학술적인 느낌이 강한 책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주는 재미가 크지만, 그것을 다소 지루함으로 받아들일 독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옥의 티다. 그래도 옥이 더 크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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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한 기생충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4-02-05 23:25 
    기생충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득한 우리나라이건만, 기생충에 대해서 소개할 만한 대중서가 없다는 것이 저자를 안타깝게 했다.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직접 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이름하여 서민의 기생충 열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무수한 기생충들이 있겠지만, 그걸 모두 다룰 수는 없고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한 녀석들을 선택해서 소개했다. 녀석들의 생활사를 그림으로 설명하고, 위험도와 증상 등을 별점으로 표현했다. 가장 익숙한 회충이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