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린의 아기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5월
품절


바르크 씨가 잠시 말을 멈췄다.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제가 스무 살 되던 해였어요. 스무 살 나이에 뭘 알겠어요. 아무 것도 몰랐죠. 그저 몸만 다 자란 어린애였지요. 난 아직 아이였는데, 아이일 뿐이었는데, 사람들은 제 손에 총을 쥐어줬어요. 지금도 기억납니다. 당신 나라의 그 모든 풍경이요. 마치 어제 떠나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생생하게 내 속에 남아 있어요. 그 향기, 그 색깔, 그 비와 그 숲, 아이들의 웃음과 목소리까지도,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기만 합니다."-67쪽

무슈 린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사람들이 그의 배를 갈라 한때 긴요했지만 이제는 쓸모없어져버린 장기를 들어낸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무언가가 휑하니 비어버린 느낌. 주체할 수 없는 노곤함이 그의 온몸을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는 손녀딸이 그걸 눈치 채기 원치 않았다. 그 아이를 위해 그는 강해야만 하는 ㄱ넛이다. 상디유에겐 그가 필요했다. 아직 너무도 어리고 여린 아이였기에 무슈 린은 약해질 자격도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86쪽

무슈 린은 문득 합숙소 생각이 났다. 자신을 놀려대던 여인들도, 카드에 빠져 지내던 남자들도, 시끄럽기 그지없던 아이들까지도 모두 떠올랐다. 같은 나라 말을 쓰는 그들이 없어 아쉬웠다. 사무치게 아쉬웠다. 비록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 없던 그들이지만, 그래도 그들과 함께 합숙소에 있을 때에는 고향의 말을 들으며 콧소리 나고 톡톡 끊어지는 가락 속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멀기만 했다. 왜, 도대체 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나왔어야만 했을까? 다 산 늙은이 인생 마지막이 왜 이리 온통 사라지고 묻히고 죽고 하는 것들로만 채워져야 하는 것일까?-90쪽

새로 지내게 된 이곳에서 그가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똑같은 옷을 걸치고 같은 공간에 둘러앉아 지내면서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인지. 마치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를 보듯, 그 누구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들리는 싸움 소리가 다였다.-91쪽

무슈 린의 머리는 피로와 고통에 절고 환멸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은 혼란과 너무 잦은 떠남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산다는 게 무언가? 자신이 살면서 받은 상처들을 목걸이처럼 엮어 차고 다니는 게 인생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점점 약해지고 상처받기만 하는데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도 이미 충분히 힘겹건만 어째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고 쓰라려야 한단 말인가?-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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