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크로마뇽 시리즈 1
정준호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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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세상은 기생충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장내기생충에 감염된 인구는 약 10억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지구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 이상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 셈이다. 회충, 편충, 구충 같은 장내기생충을 포함해 제3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열세 가지 감염성-특히 기생충 감염-질환을 소외 열대 질환이라고 부른다. 소외 열대 질환들은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한 계층,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소외 열대 질환은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있지만 정작 연구나 지원은커녕 질병의 이름조차 생소한 경우가 많다. 이제 기생충 질환으로 대표되는 열대 질환은 빈곤과 소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11쪽

주어진 주변 환경에서 모두가 억척스레 살아가던 도중, 발상의 전환을 일으킨 생명체들이 나타났다. 바로 기생충이었다. 기생충들은 주변 환경을 개척하거나 제한된 자원을 둘러싸고 경쟁하기보다는, 아예 다른 경쟁자들의 몸 안에 들어가 그들이 획득하는 물질을 고스란히 가로채기로 했다. 세상은 셀 수 없이 많은 생물들로 뒤덮여 있었고, 기생충들에게는 그만큼의 보금자리와 먹잇감이 널려 있었다. 기생은 혁명이었다. 이제 지구상에 기생충 하나쯤 없는 생물은 없으며, 기생충과 다른 모든 생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세상을 뒤덮은 기생충은 진화를 주도했고, 성을 탄생시켰으며, 사회를 형성했고, 행동을 변화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주었다. 기생충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생물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26쪽

우리가 아프다고 느끼는 가정, 즉 고온·설사·기침 같은 감염성 질환의 증상들은 사실 우리 몸이 기생충에 대항하는 방법 중 하나다. 설사 실험에서 보았다시피 약을 통해 방어 기전을 억지로 막게 되면 오히려 질병의 증상이나 회복 기간을 늦추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감염의 증상을 단순히 피해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은 기생충 감염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 되고 있다.
-113쪽

메디나충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바로 알을 낳기 위해 피부를 뚫고 나오는 성충을 막대기에 감아 물을 부어 가며 천천히 빼내는 것이다. 1미터에 달하는 성충이 다 빠져나오는 데는 1~2주가량의 시간이 걸리며, 그 기간 동안 막대기에 매달린 기생충을 다리에 달고 다녀야 한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민수기 21장 6~9절)에도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는 내용이 있다. 메디나충의 치료법을 표현한 부분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 언급된 2천 년 전 치료법이 지금도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메디나충을 억지로 잡아 빼다 끊어질 경우 체내에 남은 나머지 부분이 심한 염증을 일으키거나 2차 감염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메디나충이 유행하는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정교한 외과 수술을 통해 기생충을 제거할 만한 장비나 인력이 없다는 이유도 있다.
-130쪽

유럽 지역, 흔히 말하는 구세계 사람들은 가축을 많이 길러 동물에서 옮겨오는 전염성 질병들에 자주 노출되었다. 다양한 전염병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질병에 대한 저항성도 높았고, 새로운 지역에 진출했을 때는 자신들도 모르게 전염병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새 대륙에 진출하기 전 이미 여러 번 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이나 홍역, 독감이 대표적인 질병이다. 이런 대형 전염병들은 유럽 사회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지만, 이후에는 면역력을 가진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 신세계 사람들은 유럽인들을 괴롭히던 질병에 노출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다른 대륙 사람들과 접촉하여 질병을 미리 겪어 볼 기회도 없었고, 가축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동물에서 옮겨오는 전염병도 드물었다. 결국 유럽인들이 진출했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쓰러뜨린 것은 총도 쇠도 아닌 균이었다.
-137쪽

열대 질환과 기생충들로 인해 열대 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국이 꾸준히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열대 질환이 유럽 본토에는 퍼지기 힘든 질병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등지에 옮긴 질병들은 주로 인간 사이에서 전염되는 질환들이어서 환경적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열대 질환들은 말라리아처럼 특수한 매개체가 필요하거나 열대 지역처럼 고온다습한 환경에서만 널리 전파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139쪽

식민지 주민들은 더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대단위 집약식 농업이 이루어지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인구 증가를 뒷받침할 만한 위생 시설은 갖추어지지 않아 질병이 유행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급속도로 성장하던 영국과 유럽의 면직물 산업을 지탱하기 위해 개발된 대규모 목화 농장 지역이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무차별적인 개발은 모기 같은 질병 매개체들이 폭발적으로 번식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강제 이주는 질병에 면역력이 없는 사람들을 기생충 유행 지역으로 끌어들였다.
-139쪽

말라리아는 전쟁의 양상도 바꿔 놓았다. 식민지 확장 전쟁이 시작되기 전, 유럽에서 군수물자라 하면 흔히 군인을 비롯한 탄약·식량·의복 정도를 의미했다.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던 18세기 유럽 열강들은 열대 지역 식민지 확장에는 전혀 다른 개념의 군수물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약’이었다.
-144쪽

이집트에 저수량으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아스완 댐이 건설되면서 문제가 된 것은 수몰 위협에 놓인 나일 강 유역의 고대 이집트 신전들뿐이 아니었다. 신전은 엄청난 돈을 들여 더 높은 지역으로 옮겨 수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기존 주민들은 수몰지만 간신히 벗어나 저수지 근방에서 계속 생활했으며, 농업용수를 얻기 위해 댐 근방으로 새로 이주해 온 사람도 많았다. 댐 근방에서 주혈흡충 감염자가 늘어나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이 섞인 오줌을 누는 것이 당여한 일이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피 섞인 오줌을 남자의 월경처럼 보는 지역도 생겨났다. 말라리아나 주혈흡충으로 인한 노동력의 공백으로 산업 전반에 타격을 입었다. 댐으로 인한 환경 변화는 농업 근간을 흔들어 놓는 결과도 낳았다.
-152쪽

농경의 몰락은 말라리아의 추가적인 유행으로 이어졌다. 농경지가 버려졌기 때문이다. 관리되지 않는 물이 고여 모기들이 창궐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이 물고 물리기 시작했다. 댐이 생기고 전기가 공급되는 혜택을 누리는 것은 도시에 사는 소수뿐이고, 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전기 공급은커녕 더욱 극심한 기생충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152쪽

소득 증대라는 달콤한 약속과는 달리, 담배처럼 먹을 수는 없지만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작물들에는 맹점이 있다. 지역의 식량자급률을 떨어뜨려 오히려 국외 시장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 담배 농사가 망하면 단순히 소득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굶주림과 연결된다. 자급자족형 농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또 하나는 대부분 이런 시장성 작물이 거대 육종 회사나 유통 업체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고소득 작물인 것처럼 선전하지만, 고가의 씨앗과 비료를 강매할 뿐만 아니라, 수확할 때가 되면 시장가격보다도 싼 값에 사간다. 사업을 지속하고 식량을 수입할 현금을 얻기 위해 기업이 제시하는 돈에 어쩔 수 없이 작물을 팔아야 하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인 셈이다.
-153쪽

데메라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말라리아 매개 모기는 주로 고인 물에서 번식하여 가축들의 피를 흡혈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옥수수나 카사바 밭은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인 물이 별로 없어 모기가 번식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쌀농사를 위해 개간한 논은 대량의 고인 물을 필요로 했고, 물로 가득 채워진 논은 모기의 서식처가 되었다. 물이 많이 필요한 논농사의 특성상 대규모의 관개수로가 확보되었으며, 이 수로 역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모기의 서식처가 되기에 알맞은 환경이었다. 모기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만으로도 말라리아가 유행할 위험은 충분했지만, 주변 초원을 논으로 개간해 마을 주변에 가축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 또한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가축을 먹이로 삼던 모기들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었지만, 정작 피를 빨 수 있는 가축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모기들은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사람들이 논에 심은 종자는 말라리아라는 작물이 되어 되돌아온 셈이다.
-156쪽

생산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광대한 숲을 개간하고 대형 플랜테이션을 농장을 경영한 것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질병을 유행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열대 지역의 대형 농장을 일컫는 플랜테이션은 단일 작물만을 키우기 때문에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치는 주범이기도 하다. 환경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개발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람과 환경 간의 접촉을 막아주던 다양한 장벽들을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제거해 파괴적인 결과가 돌아온 경우는 수없이 많다.
-157쪽

제2차 세계대전은 말라리아 관련 연구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전쟁 당시 추축국과 연합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이탈리아나 태평양 전선은 말라리아 유행이 극심하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이 확보는 전쟁의 승패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일본은 이를 노리고 전쟁 초기부터 세계 최대 기나나무 생산지인 자바 섬을 점령하고 연합군 측으로 키니네가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필수적인 전쟁 물자 확보에서 밀린 연합군, 특히 미국은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가정에서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살충제, DDT도 개발되었다.
-161쪽

장내기생충들을 필두로, 이렇게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 여러 질병들을 ‘소외 열대 질환’이라고 부른다. 세계보건기구에서 규정하고 있는 소외 열대 질환은 총 열세 가지 질병)브루리 궤양, 샤가스 병, 뎅구열, 메디나충증, 간질증, 수면병, 리슈마니아편모충증, 한센병, 사상충증, 강변실명증, 주혈흡충증, 장내기생충증, 독사교상, 트라코마, 요우스)으로 전 세계에서 약 13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질병들로 고통받고 있다. 현재 지구 인구 가운데 1/5이 감염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대 질환의 위험 지역에서 벗어난 곳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환이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하거나 굉장히 드문 질병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소외된 질병’들은 여전히 연간 수백만의 인명을 앗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외 열대 질환으로 고통받는 지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치료약의 개발이나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질병들이 가난과 소외의 상징이 되어 버린 셈이다.
-185쪽

개인위생의 향상이나 안전한 상하수도 시설, 간단한 항생제만으로도 몰아낼 수 있는 다양한 질병들, 안전한 치료법이 있지만 경제적 한계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부패하고 무너진 정치 때문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사회 기본 보건 의료 시스템,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세계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을 고통에 몰아넣고 있다. 그와 반대로 이 모든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질병들이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믿고 있다. 지속적인 관심만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단적인 예로 미국에서 감기와 독감에 사용되는 의료비는 아프리카에서 소외 열대 질환 박멸과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전체 금액을 넘는다. 단순히 집의 벽을 진흙에서 합판으로 바꾸는 것, 간단한 식수 펌프를 놔주는 것만으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장애에서 해방된다. 감기보다 이런 질병들에 쏠리는 관심이 적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195쪽

2009년 브라질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열대우림의 5%가 개발되면, 개발된 지역의 말라리아 감염자가 25%나 증가한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농장을 위해 무분별한 확장이 반복되던 20세기 초반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기생충에 시달려 죽어 가야 했다.
-198쪽

천연두는 오랜 세월 인간을 위협해 온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특히 16세기 대항해시대 직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럽인들이 들여온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는 원주민 인구의 90%가 사망하기도 했다. 1980년 세계 보건기구가 공식적으로 천연두 박멸을 선포하기 전까지, 천연두는 한 세기 동안 5억여 명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200쪽

수렵 채취 생활을 벗어나 농경 생활에 접어들자 숙주로서의 매력은 더욱 커졌다. 농경 사회 이전 수렵 채취 생활에서는 주로 동물들을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이 많았다. 인구 규모가 작아 인구 전체가 기생충에 면역력을 획득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만 유행하는 기생충은 길게 활동하기 어려웠다. 회충이나 촌충처럼 면역력을 획득하기 어려운 기생충이라도 대변을 통해 나오는 기생충 알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어, 주거지역의 오염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수렵 채취를 하는 사람들은 영구적인 마을을 형성하기보다는 사냥감을 따라 이동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접촉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하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더 많은 인구가 한데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어나고 출산율이 높아지면서 기생충은 비로소 인간의 풍토병이 될 수 있었다.
-218쪽

구충은 대변을 통해 알이 빠져나오면, 땅에서 부화하여 유충이 된 다음 사람의 피부를 파고 들어가 한 살이를 완성한다. 그러나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에서 땅이 메마르면 유충이 말라 죽는다. 인간은 탄광과 터널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서 갑자기 구충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터널에서 온 구충들이었다. (...)인구밀도가 높은 현장 상황은 열악했다. 터널 공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공사장 안에서 생리 현상을 모두 해결해야 했다. (...) 공사가 끝나자, 터널에서 일한 사람들은 구충에 감염된 채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구충이 남았다. 19세기 증기기관의 개발과 함께 늘어난 탄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생충이 새로운 숙주를 찾는데 거쳐야 하는 귀찮고 위험한 작업들을 인간이 대신해 주기 시작했다.
-220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운송 수단의 발달은 인간뿐만 아니라 기생충에게도 혁명이었다. 먼 거리를 단시간에 이동할 수 있는 인간에 편승해 기생충이 번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7세기 노예무역이 극에 달한 시기, 서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로 넘어간 각종 기생충들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 충분히 살펴보았다. 21세기에는 17세기와는 또 다르다. 17세기에는 서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성질 급한 기생충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는 시간이다. 이제 대서양을 넘는 데는 겨우 한나절이 걸린다. 지구 전역이 비행기와 컨테이너 선박이라는 크고 빠른 네트워크로 엮이게 되면서 기생충의 전파가 더욱 손쉬워졌다.
-221쪽

개발된 지역 내 초목은 농경을 위한 화전으로 소모되거나, 가축들의 먹이로 사라졌다. 강변에서 초목이 사라지면서 토양 유실이 가속화되고, 사막화를 촉발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기생충학의 딜레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삶을 개선하기 위해 기생충을 박멸했지만, 기생충이라는 부담을 제거하자 사망률이 낮아져 인구 폭증이 일어나거나 개발 장벽이 사라져 과도한 개발이 오히려 환경과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기생충학이 진정한 성과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기생충의 박멸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박멸은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기생충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대비 없이 단순히 기생충만 몰아낸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224쪽

기생충에 대한 답은 기생충에 있었다. 차세대 살충제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곤충에 기생하는 곰팡이다. 곤충 병원성 곰팡이라고 불리는 이 균류는 동충하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곤충을 감염시킨 곰팡이는 몸을 파고 들어가 곤충을 죽이고 그 몸을 영양분 삼아 자라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곤충은 저마다에 기생하는 곰팡이 한 종씩을 가지고 있다. 곰팡이들 중 백강균과 녹강균은 이미 메뚜기나 흰개미 방제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효과 또한 입증되었다.
-236쪽

덜 위험한 기생충으로 더 위험한 기생충을 치료한다는 발상은 어찌 보면 엽기적이며 비윤리적으로까지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발한 발상은 이미 한 세기 전에 실용화되었다. 심지어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널리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 노벨상이라는 영광까지 안겨 주었다. 기생충을 치료제로 이용해 1927년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줄리어스 와그너-유렉이었다. 와그너는 말라리아를 이용해 신경매독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매독이 중추신경에 침범하는 것이 신경매독인데, 방치할 경우 중추신경에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힌다. 항생제가 없던 과거, 신경매독은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치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245쪽

알레르기나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 같은 자가면역질환들은 우리 몸의 면역계가 주변의 무해한 물질에도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염증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이런 질병들이, 장내기생충을 찾아보기 힘든 선진국이나 도심지에서 특히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생각했다. 자가면역질환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은 장내기생충 박멸이 완료된 시점과 겹친다. (...)이렇게 탄생한 이론이 바로 위생 가설이다. 인간이 지나치게 위생적인 환경에 살게 되면서 면역계를 조절해 주던 장내기생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노출되어야 하는 기생충과 미생물들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면역계가 모든 것에 과민 반응을 한다는 내용이다. 위생 가설에 기초한 다양한 시도들은 지금까지 불치, 혹은 난치성으로 분류되던 자가면역질환에 상당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248쪽

기생충을 통해 인류 이동의 역사를 살펴볼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는 기생충과 시작부터 함께해 왔고, 기생충과 인류는 더불어 진화해 왔다. 인류에 특화된 기생충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역사를 함께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이 최근 기생충학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조명되고 있는 고기생충학이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것은 이제 정설로 굳어졌지만, 정확히 언제 어느 경로로 어느 지역을 향해 육로를 통해 움직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256쪽

기생충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이다. 기생충 질환 같은 소외 열대 질환은 먼 열대 국가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10여 년간 경제 및 식량 사정이 급격히 나빠진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지속적인 굶주림과 영양 결핍으로 인해 면역력이 약해져 각종 기생충의 감염에 더욱 취약해졌다. 의약품이나 기존의 의료 보건 체계마저 무너진 지금 북한은 심각한 기생충 감염의 위협을 맞이하고 있다.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한과 남한의 기생충 감염률은 비슷했다. 하지만 부단히 노력한 결과 남한에서 기생충은 거의 박멸 단계에 이르렀고, 일부 흡충이나 북한과의 경계 지역에서 유행 중인 말라리아를 제외하면 기생충의 위협에서 크게 벗어난 상태다. 반면 북한의 경우, 의료 인력은 둘째치더라도 약품 생산 시설이나 원료를 확보할 수 없어, 간단한 항생제나 기생충 약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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