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의미 민음의 시 169
김행숙 지음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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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13쪽

화분의 둘레

이 작은 화분 한 개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꽃을? 꽃과 잎을? 꽃과 잎과 벌레를? 나는 화분의 세계를 망칠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플러그를 뽑듯이 나는 화초를 뽑아 던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물이 끓지 않고, 이제부터 조용해져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전화선을 자르듯 너의 줄기를 자르고, 이전과 이후과 각각인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나는 가장 가난한 삶을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라고 생각했습니다.

발자국이 없고, 물이 없고, 짹짹짹 새소리가 없고, 엄마가 없고 엄마가 없는. 엄마 없이 떠 있는 별의 지표면에서. 한 명의 아기도 울지 않는 별에서 살아가는 어떤 삶, 열렬하고 고독하고 게으른 삶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장 넓은 화분의 둘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걷다가 걷다가 지구에는 골목길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 몇 개를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았습니다. 내일도, 라고 생각했습니다.
-44쪽

보호자

비 때문에 실내외 실외가 분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폭풍우의 효과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찻잔 속의 검은 물은 고요합니다. 아름다운 찻잔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깨지기 쉬운 도자기입니다. 값비싼 것이긴 하지만 쩗, 도자기 하나쯤이야. 당신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입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검은 물처럼 내 안에 머무르시길. 내 안에서 마침내 임종하시길.

바닷가의 소나무들이 한쪽으로 휘어졌듯이 나는 당신을 향해 긴 팔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라는 걸 확인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그것 때문에 당신은 괴로워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눈동자, 당신을 위해 쉬지 않고 테이프를 감는 녹음기, 당신을 보여 주고 당신을 들려주는 나는 당신과 거의 동일한데도 말이죠. 마음속을 한없이 파고드는 것은 나쁜 성향입니다. 나를 따돌리지 마세요. 거지말이라도 좋으니, 좋습니다, 계속, 계속 속이세요. 나는 믿는 척하다가 믿겠습니다. 입술이 마음을 불러내지 않으면 끝없이 타오르는 마음은 입술을 태울 겁니다. 나는 -84쪽

그것을 악마라고 부릅니다. 나는 당신의 미래에 먼저 가 있고 싶습니다.

당신의 미래에서 당신을 끌고 가겠습니다. 당신은 악마를 본 것 같군요. 나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달아났나요? 헐떡거리는 내 사랑, 내 아기, 누구의 반대편에서 깨어났나요? 꿈의 유리 조각은 내가 치우겠습니다. 잘못 만지면, 만지면...... 그러니까 아, 이 핏방울은 나의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피입니다. 개의치 마세요. 우리는 한 몸이니까. 이제 당신에게 당신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여요. 그렇죠? 그렇죠?-85쪽



눈을 감았다는 것

발가락이 꼬물거리며 허공으로 피어오른다는 것

발바닥이 무게를 잊었다는 것

감은 눈처럼

발은 다른 기억을 가지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그곳에 속하는-88쪽

이 책

낭독을 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지만, 킁킁 짐승의 냄새를 맡듯이 이 책의 숨소리, 문체의 숨결을 느낄 때.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 뒤에 숨겨진 사랑을 내가 은신시켰다고 생각해요.
아아, 나는 사랑 없이는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해요. 바람에 맡겨진 나뭇잎 같은 마음으로 낭독을 하겠습니다.
익사하려는 사람이 서서히 잠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낭독하겠습니다. 익사하려는 사람이 갑자기 허우적거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머리를 쳐들며 낭독하겠습니다.
이 책을 부정하고, 강하게 부정하는 마음으로 낭독하겠습니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녹일 듯이 뜨거운 목소리를 냅니다.
목소리에게 허공은 펄럭이는 종이입니까. 내 목소리도 하얗고 허공도 하얗습니까.
목소리는 허공을 만지고 허공은 목소리를 만집니다. 이 책이 낭독되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도 만질 수 없고 허공도 만질 수 없습니까. 지금도.
지금도 이 책은 이 책입니까.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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