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망국 - 오백 년 왕조가 저물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구판절판


청과의 전쟁 명분을 얻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군은 이로 인해 거세질 조선 내 반일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두 가지 카드를 썼다. 그 하나는 대원군과의 결탁이다. 임오군란 때 군인들도 대원군에게 의지했고 갑신정변 때의 김옥균 일파도 대원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때의 전봉준도 홍계훈에게 보낸 글을 통해 대원군의 국정 보좌를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백성의 신망은 드높았지만 청국에서의 억류 생활 4년을 보내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건만 내내 가택연금 상태로 보내야 했다. 권력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울분이 컸을 대원군. 그런 그의 울분을 일본 측이 파고든 것이다. 대원군은 우선 민씨 척족 중에서 평판이 안 좋은 이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대원군에게 허용된 권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삼고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등을 위시한 온건개화파와 유길준, 조희연, 김가진 등의 급진개화파들을 망라해 내각이 짜였는데,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구성이다. 일본이 꺼내든 또 하나의 카드는 내정개혁이었다. 이를 위해 군국기무처가 꾸려졌다.
-73쪽

가장 참혹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향년 45세. 죽고 나서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죽음이 공식 확인되었고 2년 넘게 지난 고종 34년(1897년) 11월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다. 그녀를 만났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세련되고 지적이며 총명한 여인으로 기억한다. 초대 미국 공사 루셔스 풋의 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강력하면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성격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요. 동양 전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여성입니다." 왕비 시해에 참여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평한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정치력을 지녔지. 멍청했으면 우리가 죽일 이유도 없잖아." 실제 그녀는 정세에 대한 빼어난 이해와 판단력을 지녔고 위기 상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인아거일을 주도했을 만큼 외교적 안목과 수완도 빼어났다. 그러나 당대 조선인들의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유길준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녀는 세계 역사상 가장 극악한 여인!"
-156쪽

이런 부정적 평가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편견이 자리하지만(암탉~) 그러나 현실적인 근거들도 충분히 있다. 일단 그녀는 권력의 중핵이었고 그녀에게 기댄 민씨들의 전횡이 있었다. 갑신정변 때 칼을 맞은 민영익은 당시만 해도 선교사 자격으로 와 있던 앨런에게 치료받았다. 완쾌되자 민영익은 치료비 외에 사례로 10만 냥을 더 주었다 한다.(당시 3천냥 정도 유동 자산을 보유하면 서울에서 부자로 통했다.) 갑오개혁 때 탐오 혐의로 유배된 민형식이 끌어모은 돈은 70만 냥에 이르렀다.(1895년 국가 세입이 480만 냥) 그럴 정도로 민씨 정권의 유력자들은 매관매직, 뇌물수수 등을 통해 치부했고 벼슬을 산 이들은 투자비를 뽑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다. 삼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에 모든 원성은 왕비와 민씨 척족을 향했다.
-159쪽

민씨 정권이 취했던 정책들은 또 어떤가? 개화라는 큰 방향을 잡기는 했으나 장기적 비전을 갖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내정 개혁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잦은 궐내 잔치와 굿판. 누구 못지않게 서양 세계의 실상을 많이 알았고, 그런 만큼 개화된 모습을 보일 법했지만, 굿이나 무당에 의지하는 전근대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160쪽

이런 일들로 그녀의 정치는 많은 비판을 불렀다. 그런데 이 모든 비판, 즉 민씨 척족의 전횡과 삼정의 문란, 일관성 없는 개화정책, 굿판 등의 구태...... 이 모든 책임은 왕과 왕비 공동의 것이다. 왕비의 조언에 힘입어 친정하게 된 이래 왕은 줄곧 왕비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해왔다. 왕에게 가장 두려운 상대는 다름 아닌 아비 대원군. 임오군란은 이를 선명히 확인시켜주었다. 그 뒤로도 세상을 뒤집으려는 이들은 민씨 정권의 타도를 내걸었고 한결같이 대원군과의 연대를 꾀했다. 그 무서운 아비를 상대하려면 왕비의 지혜와 왕비의 일가 사람들이 필요했다. 왕비는 왕의 요구에 충실히 응답했다. 그렇게 왕비는 최대 정적인 대원군과 맞서 싸우는 동맹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요 후원자였다. 말하자면 둘은 정치적 일심동체였다. 때문에 공도 과도 공동의 것이라 하겠다.
-162쪽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 보인 황제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가 하면 현실론을 펴는 이완용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인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강단 있는 태도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황제를 만났던 적잖은 외국인은 이런 평을 내놓았다. "황제는 죽음을 많이 두려워하는 인상." 확실히 황제에게는 위기의 시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단호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그렇기도 하려니와 지나온 경험으로 볼 때 이해되는 면도 있다. 숱하게 찾아왔던 위기, 그때마다 황제는 몸을 낮추고 입을 다물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반전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왕비 시해 후 숨막혔던 감금생활도 흥분하지 않고 조심스레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극적으로 벗어났다. 그랬던 것처럼 황제는 조약에 반대하고 그 심각성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목숨 걸고 반대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반전을 기대하면서.
-270쪽

일본은 귀족령을 만들어 왕실의 혈족과 병합에 공이 큰 이들, 포섭할 필요가 있는 이들 등 모두 75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렸다. 을사조약의 반대자였던 민영기와 5적에 들지 않았던 이하영도 받았다. 이중 김석진은 작위를 받은 걸 수치로 여겨 자결했고, 자결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조정구(대원군 둘째 사위)를 비롯해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홍순형, 조경호는 작위를 반납했다. 김가진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의 일을 맡아보다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윤식, 이용직, 김사준은 뒷날 반일운동을 했다가 작위를 박탈당했다. -305쪽

계속 논의되어온 일이 현실이 된 탓일까? 이미 조정이 친일 일색이었던 때문일까? 재야 사학자 황현이 절명시를 남긴 채 목숨을 끊고 전 러시아 주재 공사 이범진은 전보로 고종에게 유서를 보낸 뒤 거실에서 목을 맸다. 그 밖에도 지방 군수로 있던 벽초 홍명희의 아비를 비롯해 자결하는 이가 더러 있었지만 을사년 같은 격렬한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가 10년, 20년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어느덧 식민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갔다. 작위를 받은 이들 말고도 나라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열망했던 이들도 상당수는 점차 일제와 타협해갔다. -307쪽

일본과 맞서 싸운다는 건 너무도 무모해 보였다. 그런데 그토록 무모해 보이는, 승산이 1%도 안 되어 보이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35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다. 가산을 정리하고 국경을 넘어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꾸리는가 하면, 직접 무장투쟁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엄중한 감시를 뚫고 지하조직을 구축하며 저항활동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은 지독히도 악랄했다. 독립투쟁의 길은 추위와 배고픔, 고문과 투옥, 총살과 교수대, 그리고 가족의 고난과 곤궁이 예정된 길이었다. 그 모든 걸 감당하며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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