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8
정윤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6월
품절


어디 숨었냐, 사십마넌



시째냐? 악아, 어찌고 사냐. 염치가 참 미제 같다만, 급허게 한 백마넌만 부치야 쓰겄다. 요런 말 안 헐라고 혔넌디, 요새 이빨이 영판 지랄 가터서 치과럴 댕기넌디, 웬수노무 쩐이 애초에 생각보담 불어나부렀다. 너도 어롤 거신디, 에미가 헐 수 읎어서 전활 들었다야. 정히 심에 부치면 어쩔 수 없고......

선운사 어름 다정민박 집에 밤마실 나갔다가, 스카이라던가 공중파인가로 바둑돌 놓던 채널에 눈 주고 있다가, 울 어매 전화 받았다. 다음 날 주머니 털고, 지갑 털고, 꾀죄죄한 통장 털고, 털어서, 다급한 쩌언 육십마넌만 서둘러 부쳤다.

나도 울 어매 폼으로 전활 들었다.

엄니요? 근디 어째사끄라우. 해필 엊그저께 희재 요놈의 가시낭구헌티 멫 푼 올려불고 났더니만, 오늘사 말고 딱딱 글거봐도 육십마넌뻬끼 안 되야부요야. 메칠만 지둘리먼 한 오십마넌 더 맹글어서 부칠랑께 우선 급헌 대로 땜빵허고 보십시다 잉. 모처럼 큰맘 묵고 기별헌 거이 가튼디, 아싸리 못혀줘서 지도 잠 거시기허요야. 어찌겄소. 헐헐, 요새 사는 거이 다 그런단 말이요.

떠그럴, 사십마넌 땜에 그날 밤 오래 잠 달아나버렸다.-28쪽

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억을 가진 사람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을 기다려본 기억이 없는 사람의 인생의 무늬에는 어딘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생의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 모든 생의 그 그늘들은 다른 방식으로 스러지기도 할 것 같았다.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등에 대고서라도, 이제라도 '그'를 한번 기다리며 서 있어보라고, 가만히 말을 건네주고 싶었던 가을날이 있었다. -36쪽




집, 얼룩무늬의 털스웨터 한 벌로 평생을 나는 표범을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의 집이 어쩌면 저 한 벌의 털스웨터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부러움에 빠져본 적이 있다.

집, 아니 짐이여. 무거움이여.

집, 그러나 나는 내 말년의 모습이 조금쯤은 말라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적지 않다. 별로 그럴 일은 없을 듯하지만, 볼따구니의 살집이 한 점의 긴장도 없이 추욱 늘어지거나, 욕심의 뱃구레가 오크통처럼 불거져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았으면 싶다.

집, 표범이 아니라도, 실은 내 몸도 한 채 집이었구나.-89쪽

밥經


저를 다하여 하냥 온기를 게워 올리는

향처럼 피워 올리는

둥근 지붕부터 헐어 몸 열어주던

거기, 원적외선 담요보다

푹신하고 느른한

寺院 같던, 입으로 읽었던.-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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